정책 패러독스: 정책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정책 패러독스: 정책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데버러 스톤(Deborah Stone)의 ‘정책 패러독스’는 정책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의 산물이 아니라, 상충하는 가치들이 충돌하고 타협하는 정치적 과정의 결과물임을 보여줍니다.
정책 패러독스의 관점은 교육계에서 반복되는 정책 입안자와 현장 교사 간의 동상이몽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특히 교육 정책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 교육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1. 정책은 기술 도입이 아닌 ‘가치 투쟁’의 장이다.
교육 현장에 도입되는 정책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는 중립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합리적 개인들의 경쟁과 교환이 일어나는 ‘시장(Market)’ 모델이 아닌, 공동의 가치와 이상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정치 공동체, 즉 ‘폴리스(Polis)’ 모델로 설명되는 정치적 과정이라는 스톤의 핵심 주장을 반영합니다. 디지털 기반 교육 혁신은 바로 이 ‘폴리스’에서 형평성, 효율성, 안정, 자유라는 핵심적인 정책 목표들이 서로 충돌하며 벌어지는 가치 투쟁의 새로운 장입니다.
- 형평성 vs. 효율성: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디지털 기기를 보급하는 것(수평적 형평성)이 진정한 교육 평등을 보장할까요? 오히려 디지털 활용 능력이 부족한 학생에게 더 많은 지원을 집중하는 것(수직적 형평성)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한편, AI 기반 맞춤형 학습은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를 최적화하는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공동체 역량 함양이라는 가치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 자유 vs. 안정: 학생들에게 디지털 기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자유)이 창의성을 높일 수 있지만, 유해 콘텐츠 노출이나 사이버 불링과 같은 위험(안정)에 대한 우려를 낳습니다. 교육 당국이 제시하는 플랫폼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안정적일 수 있으나, 교육 내용과 방식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 교육자를 위한 제언: “이 정책이 추구하는 효율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가 지켜야 할 교육적 형평성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동료 교사들과 함께 끊임없이 토론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정책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학교, 우리 학급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하는 주체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2. 정책 ‘동상이몽’의 심화: 상징(Symbol)과 사실(Fact)의 재구성
정책 입안자와 현장 교사 간의 인식 차이, 즉 ‘동상이몽’은 단순한 소통 부재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톤은 ‘폴리스’ 내에서의 소통이 객관적 정보 전달이 아닌 설득을 위한 전략적 행위라고 강조합니다. 이때 ‘상징(Symbol)’과 ‘사실(Fact)’은 현실을 특정 방향으로 재구성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며, ‘동상이몽’은 서로 다른 집단이 각자의 이익과 가치에 따라 상징과 사실을 다르게 구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 ‘상징’이 만드는 거대 서사와 ‘사실’의 도구화: 정책은 ‘상징’이라는 옷을 입고 사람들의 인식과 감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상징’이 거대한 서사(이야기)의 틀을 제공하면, ‘사실’은 그 안에서 설득의 재료로 동원되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습니다. 정책 입안자(교육부)는 정책 목표에 부합하는 ‘사실’을 선택, 재구성, 해석하여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 ‘사실’의 재구성과 현장의 괴리: 문제는 정책이 제시하는 ‘사실’과 현장 교사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현실(‘사실’)이 달라 괴리감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스톤이 지적하듯, 숫자나 통계 같은 ‘사실’은 결코 가치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정 의도를 가지고 선택되고 분류된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교육부가 제시하는 ‘사실’이 현장의 어려움을 외면한 정보라고 인식될 때, 정책 집행자와 실행자 간의 신뢰는 하락하고 정책 집행의 원동력은 상실됩니다.
💡 교육자를 위한 제언: 정책이 제시하는 통계나 연구 결과(‘사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이 사실은 어떤 더 큰 이야기(상징)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되었는가?”, “이 사실이 간과하거나 왜곡하는 현장의 현실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질문해야 합니다. 현장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기록하고 공유하며 정책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3. 정책의 이면에 숨은 ‘상징 장치’를 읽어내라.
정책의 표면적 논리를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주장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톤이 강조하는 정책 분석의 핵심입니다. 디지털 교육 정책 역시 다음과 같은 강력한 ‘상징 장치’, 즉 정치적 설득을 위한 이야기(Causal Stories)와 비유(Metaphors)를 통해 추진됩니다.
- 변화의 이야기 (위기를 통한 설득): ‘팬데믹’, ‘불확실한 미래’와 같은 위기감을 조성하여 ‘디지털 대전환’과 같은 정책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전략입니다. 이는 특정 현상을 긴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규정하고,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인과적 이야기(Causal Story)’ 만들기 방식입니다.
- 권력의 이야기 (정부의 약속): ‘2022 개정 교육과정’, ‘고교학점제’와 같은 정책을 내세우며 정부가 미래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문제의 책임과 해결 능력이 정부에 있음을 주장하는 인과적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스톤이 경고하듯, 이러한 이야기는 종종 정책 실패의 책임을 현장 교사나 학생에게 돌리는 ‘희생자 비난’의 역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비유적 표현 (특정 이미지 각인): ‘학습 나침반’과 같은 직관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정책의 방향을 암시하고 대중에게 정책의 의미를 각인시킵니다. 스톤은 이런 ‘비유’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특정 프레임을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핵심적인 상징 전략이라고 설명합니다.
💡 교육자를 위한 제언: 정책 홍보 자료나 연수에서 제시되는 장밋빛 청사진과 상징적 구호들을 넘어, 그 정책이 우리 학생들의 삶에 미칠 구체적인 영향을 다각도로 예측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성공 사례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기 과몰입, 학생 데이터 프라이버시 침해 등 부작용과 어려움에 대한 ‘대안적 이야기’를 수집하고 공론화하여 정책을 더 건강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4. 정책 ‘문제’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책 ‘문제’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정책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 사실을 전제로 하는 합리주의 모델을 비판하는 스톤 이론의 핵심으로, ‘문제 정의(problem definition)’야말로 특정 가치와 관점을 관철하려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어떤 현상을 ‘문제’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무엇으로 지목하느냐에 따라 해결책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 ‘디지털 격차’ 문제의 재정의: ‘디지털 격차’라는 문제를 ‘학생들의 디지털 기기 보유율 차이’로 정의하면, 해결책은 기기 보급 사업이 됩니다. 하지만 이를 ‘가정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디지털 활용 능력 및 문화 자본의 차이’로 정의하면, 해결책은 기기 보급을 넘어 교사의 전문성 강화, 가정 연계 교육, 문화적으로 소외된 학생을 위한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이 되어야 합니다.
💡 교육자를 위한 제언: 정책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어떻게 정의되었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정책은 문제의 원인을 학생 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보는가, 아니면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보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나아가 현장의 교사들이 겪는 진짜 ‘문제’가 정책 논의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 문제 정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5. 모든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정책은 종종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병통치약처럼 제시되지만, 스톤은 모든 정책적 해결책이 의도치 않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 역설을 가진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복잡한 유기체와 같은 정치 공동체(Polis)에서 하나의 인위적 개입이 의도치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를 낳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스톤의 통찰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정책 과정은 문제 해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낳는 순환의 연속입니다.
- ‘디지털 교과서’가 낳는 새로운 문제들: ‘디지털 교과서’ 도입은 학생들의 무거운 가방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학생들의 스크린 타임 증가로 인한 시력 저하 및 디지털 피로감, 가정의 인터넷 환경에 따른 학습 격차 심화, 콘텐츠 업데이트 및 기기 유지보수 비용 발생, 교사의 역할 변화에 대한 혼란 등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 교육자를 위한 제언: 새로운 정책이나 기술이 도입될 때, 그것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부작용과 역설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생태학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특정 ‘해결책’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이 정책이 우리 학교,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올까?”를 동료들과 함께 논의하고,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완충 장치와 대안을 미리 고민하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결론
‘정책 패러독스’는 교육자들에게 디지털 교육 혁신 정책의 단순한 ‘소비자’나 ‘집행자’가 아니라, 정책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를 저울질하며, 현장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정치적 행위자(Political Actor)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관점과 렌즈를 가질 때, 우리는 기술의 논리와 정책의 거대 담론에 휩쓸리지 않고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며 진정한 혁신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APA 7th Edition)
[국문 번역본] Stone, D. (2017). 정책 패러독스: 정치적 결정의 예술 (신현석, 선애경 역). 모아북스.
[영문 원서] Stone, D. (2012). Policy paradox: The art of political decision making (3rd ed.). W. W. Norton &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