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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평가 폐지, 그 너머: 학습과학·국제비교·OECD PISA 함의를 바탕으로

한국 초등학교의 총괄평가 폐지는 과정 중심 교육이라는 이상을 향한 중대한 변화였지만, 그 이면에서 교사 권한 약화와 학부모 민원 증폭이라는 현실적 그림자를 낳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국내 교육 현장의 혼란을 넘어, PISA 결과가 보여주는 국제적 평가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과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평가가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학습과학의 원리와 국제 사회의 경험을 아우르는 근본적인 성찰이 시급히 요구됩니다.

교육 평가 생태계 관련 이미지

문헌 고찰

총괄평가의 장점과 한계는 오래전부터 학계의 관심사였습니다.

Bransford, Brown, & Cocking (2000)은 학습을 누적적·맥락적 과정으로 규정하며 단발적 시험의 한계를 강조하였습니다. Black과 Wiliam (1998)은 형성평가(formative assessment)가 학습 개선에 미치는 효과를 메타 분석으로 입증하였으며, Hattie (2009)는 형성평가의 효과 크기를 d = 0.90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반면 Ingersoll (2003)은 교사의 평가권이 교사 전문성의 핵심 권위임을 강조하면서, 평가 방식의 변화가 교사 권위 약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처럼 평가 제도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조정이 아니라 교육 생태계의 권력 구조와 신뢰 체계를 재편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학습 도구의 상실과 피드백의 실종

시험은 학습 결과를 단순히 확인하는 수단을 넘어,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학습 활동입니다. 이 중요한 기능이 총괄평가 폐지와 함께 교실에서 사라졌습니다.

인출 연습의 실종

배운 것을 머릿속에서 꺼내보는 ‘인출(retrieval)’ 행위는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여 장기 기억을 강화하는 핵심 과정입니다(Roediger & Karpicke, 2006). 정기적인 시험은 학생들에게 이러한 인출 연습을 강제하는 효과적인 기제였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사라진 교실에서 학생들은 배운 내용을 체계적으로 복습하고 인출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는 곧 학습 내용이 단기 기억에만 머물다 쉽게 사라지는, 비효율적인 학습 패턴을 고착화시킬 위험을 내포합니다.

가시적 피드백의 부재

좋은 평가는 학생에게 ‘목표는 저기인데, 너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다음 단계로 가려면 이것이 필요해’라고 알려주는 명확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합니다(Hattie, 2009). 과거의 시험 점수는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학생과 학부모에게 현재 학습 수준에 대한 직관적이고 가시적인 피드백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서술형으로 기술되는 과정중심평가는 그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구체적인 데이터 없이는 학부모에게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학생은 자신의 성장 경로를 구체적으로 인지하기 어렵고, 학습 동기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물론 총괄평가를 대신한 다양한 과정중심평가를 활용한다면 위에서 전술한 부정적 효과가 아니라 역으로 긍정적 효과로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Roediger & Karpicke (2006)에 따르면 시험은 단순 평가가 아니라 장기 기억을 강화하는 회상 장치이며, 총괄평가 폐지 후 교사들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저부하 퀴즈, 학습 저널, 상호 질의 응답 활동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은 시험 점수에 집중하는 대신 프로젝트 기반 학습, 탐구 활동, 협력적 문제 해결 등 고차 사고를 요구하는 학습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과정 중심 평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학생별 강점과 약점을 세밀히 진단하고, 개별화된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지적됩니다.

  • 시험 자체가 제공하던 회상 기제가 사라져 학습의 장기 기억화가 약화될 수 있습니다.
  • 자기조절 능력이 부족한 학생은 과정 중심 평가 체제에서 학습 동기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Zimmerman, 2002).
  • 교사의 평가 권한이 축소되며 생활지도 및 학부모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 성취를 수치로 확인하기 어려워진 학부모는 교사의 평가와 교육 과정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평가권 위축과 교권의 약화

과거 시험 점수는 교사가 학생을 지도할 때 최소한의 객관적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이 방패가 사라지자 교사의 전문적 진단은 주관적 편견으로 폄하되기 쉬워졌고, 이는 교권 약화라는 심각한 문제로 직결되었습니다(Ingersoll, 2003).

전문성의 불신과 교사의 소진

과정중심평가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야 하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사의 노력이 학부모에게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으면서, 평가권에 대한 불신이 싹텄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싫어해서 나쁘게 써준 것 아니냐’는 식의 민원은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교사를 정서적으로 소진시키고 교육적 열정을 앗아갑니다.

지도 위축의 악순환

평가에 대한 불신은 곧바로 생활지도 영역으로 번집니다. 학습 태도나 교우 관계에 대한 교사의 지도가 ‘주관적 평가를 위한 빌드업’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교사는 문제 행동을 보고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교실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결국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까지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핀란드와 싱가포르의 비교 사례

PISA 상위권 국가들의 사례는 시험의 유무가 아닌 평가 생태계의 품질이 핵심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핀란드의 경고

핀란드는 국가 차원의 표준화 시험을 최소화하여 교사 자율성을 극대화했으나, PISA 성취도의 하락세를 겪고 있습니다. 이는 자율성과 신뢰만으로 학업 성취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합니다(Sahlberg, 2011; OECD, 2023e). 교사에 대한 높은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국가 주관 시험을 최소화한 핀란드 모델은 한때 이상적인 모델로 꼽혔습니다. 하지만 최근 PISA 성취도의 지속적인 하락은 교사의 자율성과 신뢰만으로는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기초 학력을 꾸준히 점검하고 교사의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체계가 없다면, 자율성은 자칫 방임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균형 감각

싱가포르는 저학년 지필시험 폐지 이후 학부모 신뢰 확보를 위해 성취 대시보드, 루브릭 기반 보고서, 생활·정서 영역 피드백을 제도화했습니다. 동시에 교사의 생활지도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하여 교사 권위 약화를 예방하였습니다(Chong, 2014). 이로써 학부모는 자녀 학습 과정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교사는 생활지도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평가 제도 변화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성공적인 모델입니다.

PISA와 글로벌 평가 패러다임

PISA는 단순 지식이 아닌 창의적 문제 해결력과 고차사고력을 평가합니다(OECD, 2019). 총괄평가의 축소는 이러한 국제 패러다임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국가별 경험은 결과가 상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싱가포르는 중간고사 폐지 후에도 세밀한 형성평가를 도입해 PISA 2022에서도 최고 성취를 유지하였습니다(OECD, 2023c).
  • 핀란드는 교사 자율성 중심의 체제를 유지했으나 성취 하락을 경험하였습니다(OECD, 2023e).
  • 한국은 평균 이상의 성취를 유지하고 있으나, 학부모 불안과 교사 권위 약화라는 구조적 위험 요인을 내포합니다(OECD, 2023d).

즉, 두 국가의 비교는 시험의 존재 여부보다 평가 생태계의 보완 장치와 교사 권위 제도화가 성취도와 신뢰의 핵심 변수임을 보여줍니다.

핀란드와 싱가포르 사례의 차이는 학부모 신뢰와 교사 권위 보장 여부에서 갈립니다. 핀란드는 시험 축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 가시성 장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으며, 이는 성취 하락과 신뢰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싱가포르는 시험을 폐지하면서도 학부모가 체감할 수 있는 성취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교사 권위를 제도적으로 보완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두 모델의 교훈을 절충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특히 학부모 가시성과 교사 권위 보완을 동시에 제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평가 생태계의 필요

이제 우리는 ‘무엇을 없앨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총괄평가 폐지라는 변화를 진정한 교육 발전으로 이끌기 위한 구체적인 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평가 생태계를 재설계해야 합니다. 단순히 총괄평가를 폐지하는 수준을 넘어, 교실 현장에서 다층적 형성평가와 루브릭 기반 체제를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학생의 학습 과정 전반을 진단하고 피드백하는 순환적 구조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지필평가를 변형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총괄평가를 전면 폐지하기보다는, 학습 과부하를 최소화한 저부하 퀴즈나 프로젝트 기반 평가, 수행평가와 같은 다양한 대안을 혼합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는 회상 연습의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학생의 심층 학습을 촉진합니다.

셋째, 학부모 소통을 강화해야 합니다. 단순 소통의 빈도를 늘리거나 성적표에 그치지 않고 성취 대시보드, 디지털 포트폴리오, 루브릭 기반 진단 보고서 등을 제공하여 학부모가 자녀의 학습 과정과 성취를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교사 평가의 신뢰성을 높이고 학부모 민원을 예방하는 중요한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교사의 권위를 보완해야 합니다. 평가권과 생활지도 권한을 법률 및 제도적으로 명시·보장함으로써, 교사가 교육적 판단과 생활지도를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교사 전문성 보호와 교권 회복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다섯째, 국제적 교훈을 수용해야 합니다. 핀란드의 교사 전문성 강화 모델과 싱가포르의 학부모 신뢰 확보 모델을 절충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교사 자율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면서도 학부모에게는 가시적인 성취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적 전략이 필요합니다.

여섯째, PISA 대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OECD PISA가 요구하는 고차원 사고 역량과 창의적 문제 해결력을 배양하기 위해, 과정 중심 평가와 프로젝트 학습을 긴밀히 연계해야 합니다. 이는 국제 비교에서의 성취 유지뿐 아니라 미래 교육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성장통입니다. 학습과학의 원리와 국제 사회의 사례를 바탕으로, 학생의 성장, 교사의 전문성, 학부모의 신뢰가 아름답게 선순환하는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평가 생태계를 구축해야 할 중대한 때입니다.

참고문헌

  • Black, P., & Wiliam, D. (1998). Assessment and classroom learning. Assessment in Education: Principles, Policy & Practice, 5(1), 7–74.
  • Bransford, J. D., Brown, A. L., & Cocking, R. R. (2000). How people learn: Brain, mind, experience, and school. Washington, DC: National Academy Press.
  • Chong, S. (2014). Teacher professionalism and quality in Singapore. Perspectives on Educational Research, 17(2), 65–83.
  • Hattie, J. (2009). Visible learning: A synthesis of over 800 meta-analyses relating to achievement. Routledge.
  • Ingersoll, R. M. (2003). Who controls teachers’ work? Power and accountability in America’s schools. Harvard University Press.
  • OECD. (2019). PISA 2018 assessment and analytical framework. OECD Publishing.
  • OECD. (2023c). PISA 2022 results: Singapore. OECD Publishing.
  • OECD. (2023d). PISA 2022 results: Korea. OECD Publishing.
  • OECD. (2023e). PISA 2022 results: Finland. OECD Publishing.
  • Roediger, H. L., & Karpicke, J. D. (2006). Test-enhanced learning: Taking memory tests improves long-term retention. Psychological Science, 17(3), 249–255.
  • Sahlberg, P. (2011). Finnish lessons: What can the world learn from educational change in Finland?. Teachers College Press.
  • Zimmerman, B. J. (2002). Becoming a self-regulated learner: An overview. Theory into Practice, 41(2), 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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