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병들게 하는 그림자 노동
새 학년, 교사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학생의 얼굴이 아니라 빼곡한 사업 목록이라면 학교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는가. 교사들은 더 많이 일하는데 정작 수업 시간은 줄어드는 기묘한 현실이 우리 교육 현장을 짓누른다. 교육의 본질을 가리는 가짜 노동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진다.
교사들이 학생보다 사업 목록을 먼저 만나는 이유
얼마 전, 한 교감은 새 학년 업무 분장 회의를 두 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그중 절반은 누가 어떤 사업을 맡을지를 두고 팽팽한 침묵이 오갔다. 교사들이 새 학년 첫날 학생이 아닌 ‘사업 목록’과 먼저 마주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학교가 어떤 공간으로 작동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육부는 ‘학교 가짜 일 줄이기’에 나섰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학생 상장 공적 조서 작성 관행을 없애고, 예산 증빙을 간소화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처방”이라 혹평한다. 서류 한 장을 줄이는 것으로 학교가 숨 쉴 여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짜 노동은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다. 교육의 본질을 침해하고, 교사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그림자 업무다.
OECD가 말하는 불편한 숫자
감각이 아닌 데이터로 현장을 들여다본다. OECD 국제 교원 및 교직 환경 조사인 탈리스(TALIS, 2024) 결과는 한국 학교의 기형적인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 초등교사의 주당 행정업무 시간은 4.5시간으로, OECD 평균인 2.7시간보다 무려 1.7배 많다. 일본과 더불어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흥미롭게도, 한국 초등교사의 총 근무시간은 41.1시간으로 전체 조사국 평균인 40.4시간보다 약간 길다. 더 많이 일하지만, 정작 핵심인 수업 시간은 평균 24.9시간보다 4.4시간 적은 20.5시간에 불과하다. 교사는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 머물지만, 수업에 할애하는 시간은 줄어든다.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이 평균의 1.7배에 달하는 행정업무 시간이다. OECD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한국을 “교육 성과는 높지만 교직의 지속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고성과-고위험 구조”라 진단한다. 학교가 교육이라는 목적지 대신 행정이라는 다른 길로 질주하는 모습과 같다.
‘가짜 노동’을 부르는 시스템의 작동 방식
현장에서 느끼는 가짜 노동의 핵심 원인은 따로 있다. 학교 예산 대부분이 목적사업비 형태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특정 정책 사업만을 위해 써야 하는 이 예산은 단순한 재원이 아니다. 오히려 ‘업무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하나의 사업이 학교에 내려오면 계획서를 세운다. 계획을 위한 회의가 열린다. 실행 뒤에는 결과보고와 정산, 평가와 실적 관리가 뒤따른다. 이 사업들은 교육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않는다. 별도의 과업으로 존재하며, 누적되면서 학교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행정 구조가 된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일의 본질을 꿰뚫는 말을 남겼다. “효율성은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고, 효과성은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 학교는 보고서를 더 빠르게, 계획서를 더 정확하게 작성하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과연 해야 할 ‘올바른 일’인지는 묻지 않는다. 효율적으로 가짜 노동을 하는 셈이다.
이러한 구조를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동력은 ‘불신’이다. 교육부는 교육청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교육청 또한 학교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보고하게 하고, 결과를 숫자로 증명하게 만든다. 정책은 상위 기관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실행 책임은 고스란히 학교 현장으로 내려온다. 교사는 시설 관리, 회계 처리, 개인정보 관리 등 전문성을 벗어난 일까지 떠안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한 교육부 장관조차 “불필요한 규제와 행정 부담은 학교가 교육의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라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장 교사들의 반응은 차갑다. “그 행정 부담을 만든 주체는 바로 교육부 자신”이라 말한다.
학교가 다시 교육을 시작하려면
이 문제는 단순한 절차 간소화로 풀리지 않는다. 구조적인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목적사업비 중심의 예산 구조를 전면 재편한다. 학교가 자율적으로 쓸 기본운영비를 대폭 늘리고, 공모사업과 목적사업을 과감히 줄인다. 예산이 곧 사업이고, 사업이 곧 업무라는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 학교가 비로소 교육과정의 주체로 자리 잡는다.
둘째, 시설, 회계, 복지 관리 같은 비교육 업무는 교육지원청이나 전문기관으로 넘긴다. 단순히 업무만 넘겨서는 안 된다. 그 업무를 처리할 인력과 예산이 함께 이동하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셋째,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때는 기존 사업을 동시에 정리하는 ‘원인 원아웃(One-in, One-out)’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지금처럼 새로운 사업은 계속 늘어나고, 사라지는 사업은 없는 구조가 이어지는 한, 가짜 노동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지금 학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불필요한 일이 구조적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짜 노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명백한 결과물이다. 드러커의 말을 다시 상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짜 노동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 일 자체를 없애고, ‘올바른 일’을 선택하는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학교를 행정의 종착지가 아닌 교육의 출발점으로, 교사를 사업 수행자가 아닌 교육 전문가로 돌려세워야 한다. 그 변화가 시작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한다. “학교가 다시 교육을 시작한다”고.
철학·인식론의 시선으로 보면
조직 이론에는 목표 전이(Goal Displacement)라는 개념이 있다. 본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학교의 가짜 노동은 바로 이 목표 전이의 전형적인 예시라 본다. 교육이라는 본질적인 목표는 희미해지고, 그 목표를 지원해야 할 행정 업무와 절차가 오히려 학교 운영의 주된 목표로 자리 잡는다. 교사는 본래의 전문성을 잃고 행정 절차를 완벽히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출처>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MPT_CD=M0153&CNTN_CD=A0003223223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