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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교육 현장은 기대와 불안 사이를 오간다. 생성형 AI는 학습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 주지만, 학생이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질문도 함께 던진다. 정제영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이화여대 교수)은 한국대학신문 연재 칼럼 「AX 시대, 대학교육의 길을 묻다」의 일곱 번째 글에서 이 질문에 순서로 답한다. 먼저 씨름하고, AI와 탐구하고, 자기 언어로 완성하라는 것이다. 기술보다 그 기술을 수업 어디에 놓느냐가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수식으로 가득한 칠판 앞에서 혼자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

AI, 목발인가 증폭기인가

많은 대학이 AI 시대의 교육을 이야기하며 최신 도구 도입에 몰두한다. 칼럼은 대학가의 대답이 자주 도구의 문제로 축소된다고 꼬집는다. 좋은 도구가 곧 좋은 학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부터 정확히 알아야 한다.

칼럼이 인용한 선행 연구들은 AI 활용만으로는 학습 성과가 담보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범용 생성형 AI를 활용한 집단은 연습 과정에서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AI 접근을 차단한 평가에서는 AI를 전혀 쓰지 않은 통제 집단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를 ‘목발 효과(Crutch Effect)’라 부른다. 목발은 당장의 이동을 돕지만 오래 의존하면 스스로 걷는 힘을 앗아 간다.

미국 5개 대학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에세이를 쓰게 한 뒤 한 시간 안에 자신이 쓴 내용을 재현하도록 했더니, 스스로 작성한 집단의 재현율은 89%였고 생성형 AI를 활용한 집단은 12%에 그쳤다. 뇌파(EEG) 분석에서도 AI 활용 집단은 도구 없이 작성한 집단보다 전반적으로 약한 신경 연결성을 보였다. AI가 답을 대신 내주면 학습자가 스스로 사고할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경고다.

격자무늬 그물로 표현한 보라색 뇌 모형

순서가 결과를 바꾸는 인지 활성화 우선 원칙

같은 연구의 후속 발견이 더 눈길을 끈다. AI를 먼저 쓰고 이후 혼자 작성한 집단은 뇌 활성화와 기억 유지율이 모두 낮았다. 반면 혼자 먼저 쓰고 그다음 AI를 보조로 쓴 집단은 둘 다 높게 유지했다. 같은 도구, 같은 시간인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차이를 만든 것은 도구의 성능이 아니라 학습의 순서였다.

정제영 원장은 여기서 ‘인지 활성화 우선의 원칙’을 끌어낸다. 학습자의 사고를 먼저 작동시킨 뒤에 AI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증폭기는 입력 신호가 있어야 증폭한다. 학습자의 사고라는 신호가 먼저 생겨야 AI가 비로소 그 사유를 확장하고 정교화하는 ‘인지적 증폭기’로 기능한다.

BWA-AI 교수법, 먼저 씨름하고 그다음 AI

이 원칙을 수업으로 옮긴 것이 BWA-AI 교수법이다. AI를 쓰는 수업을 Before-With-After AI의 3단계 순서로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단계 핵심 활동 AI의 역할 교수의 역할 생략했을 때
Before AI (선행적 어려움) AI 없이 스스로 씨름하며 초기 가설 세우기 없음 독립 탐색 시간 설정, 정답 대신 시도와 가설 제출 요구 목발 효과
With AI (협력적 탐구) 초기 가설을 들고 AI와 변증법적으로 대화하기 인지적 거울 사고가 확장되도록 질문 수준 설정 칼럼에 별도 언급 없음
After AI (비판적 종합) 도움 없이 자기 언어로 재구조화하거나 새 상황에 적용하기 없음 구술 설명, 무(無)AI 재작성, 성찰 기록 설계 유창성 착각

Before AI 단계에서 학습자는 새로운 개념이나 난제 앞에서 AI의 도움 없이 먼저 씨름한다. 이때의 오류와 막힘은 교정해야 할 실패가 아니다. 관련 스키마를 활성화해 인지적 준비도를 확보하는 필수 과정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생산적 실패’가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교수는 일정한 독립 탐색 시간을 과제 설계에 넣고, 정답이 아니라 시도와 가설을 제출하게 한다.

With AI 단계는 자신의 초기 가설과 미진한 이해를 들고 AI와 변증법적으로 대화하는 국면이다. 여기서 AI는 정답 인출기가 아니라 학습자의 사고를 비추고 확장하는 ‘인지적 거울’이다. 학생은 자기 논리를 AI에게 설명해 타당성을 점검받고, 동시에 AI의 응답에 숨은 허점을 되짚는다. 교수는 학생의 사고가 확장되도록 질문의 수준을 정해야 한다.

After AI 단계는 AI와의 탐구가 끝난 직후, 다시 외부의 도움 없이 학습 내용을 자기 언어로 재구조화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적용해 보는 확인 과정이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학습자는 남의 설명을 자기 지식으로 착각하는 ‘유창성 착각’에 빠진다. 교수는 체화된 역량을 확인하는 산출물로 구술 설명, 무AI 재작성, 성찰 기록을 학습의 마지막 순서로 설계해야 한다.

순서가 뒤집히면 결과도 뒤집힌다. 첫 단계를 건너뛰면 목발 효과가, 마지막 단계를 건너뛰면 유창성 착각이 기다린다. 칼럼은 이 세 단계가 학습을 활성화하는 기본 수업 설계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리벽에 붙인 접착 메모지를 정리하며 계획을 세우는 사람

교수는 이제 교육 디자이너다

전통적인 수업 설계 모델은 가르칠 내용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할지에 맞춰져 있었다. 내용 전달을 AI가 더 빠르고 값싸게 해내는 시대에는 이 틀만으로 부족하다. 교수에게는 콘텐츠를 전달하는 능력에 더해 학습 경험의 구조를 짜는 ‘교육 디자이너’의 역량이 요구된다.

가장 구체적인 과업은 과제마다 ‘AI 활용 범위’를 명시적으로 설계하는 일이다. 개념을 처음 익히는 과제는 AI 사용을 차단하고, 자료 탐색과 아이디어 확장 과제는 적극 권장하며, 최종 논증 과제는 사용 이력과 판단 근거를 함께 제출하게 한다. 학습 목표가 ‘무엇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에 따라 AI의 투입 시점과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칼럼의 표현대로 이것은 부정행위 단속이 아니라 학습 목표 설정의 문제다.

칼럼의 결론은 분명하다. 인공지능 전환(AX) 시대 수업의 질을 가르는 변수는 어느 대학이 더 좋은 AI를 도입했느냐가 아니다. 같은 모델을 쓰더라도 학습 과정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결과는 정반대로 나온다. 관건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그것을 수업에 알맞게 배치하는 교수의 수업 설계 역량이다.

설계 역량을 개인의 열정에 맡기지 않으려면

칼럼은 이 역량을 개인의 선의나 열정에 맡겨 둘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강의계획서에 AI 활용 설계를 적는 표준 양식, 교수학습센터(CTL)의 실질적 지원, 그리고 이런 설계 노력을 인정하는 교원 업적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교수학습센터의 지원은 추상적인 연수보다 BWA-AI 같은 교수법을 실제 강의안에 적용해 보는 설계 템플릿과 피드백일 때 쓸모가 크다. 동료 교수들이 자기 수업에서 AI를 어떻게 썼고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털어놓는 자리, 잘 설계된 강의계획서 사례를 모아 함께 뜯어보는 작업도 같은 이유로 필요하다.

학생들이 AI를 지식의 소비처가 아니라 사고를 넓히는 도구로 쓰게 하려면, 그 설계의 몫은 가르치는 사람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다음 학기 강의계획서에서 단 한 과제만이라도 AI 활용 범위를 명확히 적어 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출처

  • 정제영, 「AX 시대, 대학교육의 길을 묻다⑦ 먼저 씨름하고, AI와 탐구하고, 자기 언어로 완성하라」, 한국대학신문 칼럼.
  • 칼럼은 필자의 저서 『인공지능 학습혁명, 미래를 향한 교육 시스템 재설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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