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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학교 문서 앞에서 멈춘 이유는 모델이 아니라 HWP였다
교무실 컴퓨터에는 올해 받은 공문이 수백 건 쌓여 있다. 학교 규정집, 교육청 지침, 지난해 교육계획서, 가정통신문 양식까지 거의 전부 HWP다. 그 옆 모니터에는 AI 비서가 떠 있다. 둘은 같은 책상 위에 있지만 서로를 읽지 못한다. AI에게 “이 지침에서 바뀐 조항만 짚어 줘”라고 부탁하려면 먼저 한글 파일을 열어 본문을 긁어 붙여야 하고, 표가 들어간 문서는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학교에서 AI가 쓸모를 못 찾은 이유가 모델의 지능 부족이었을까? 적어도 문서 업무에서는 아니었다. 문서가 닫혀 있었다.
kordoc은 그 문을 연다. 광진구청 주무관 류승인이 만든 오픈소스 도구로, HWP 3.x와 5.x, HWPX, PDF, 워드·엑셀·파워포인트, 스캔 이미지를 마크다운과 구조화 데이터로 바꾼다. 라이브러리이자 명령줄 도구이자 MCP 서버라서, 명령 한 줄이면 클로드 코드·커서·코덱스 같은 AI 에이전트가 파일 경로만 받아 한글 문서를 읽고 비교하고 양식을 채운다. 저장소 첫 줄의 구호는 “모두 파싱해버리겠다”이고, 소개 글은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문서지옥에서 7년 버틴 공무원이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2026년 3월 말에 시작해 11월 초까지 별 2,900여 개와 포크 500여 개를 모았고, 거의 날마다 새 판이 나온다.
글자가 아니라 표가 문제였다
한글 문서를 텍스트로 뽑는 도구는 전에도 있었다. 다른 점은 표다. 공문서의 정보는 대개 표 안에 있고, 표는 병합 칸으로 얽혀 있다. 예산 산출근거, 학사 일정, 평가 계획표를 글자 순서대로 풀어 놓으면 AI는 어느 숫자가 어느 항목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kordoc은 원본 HWPX 2,424건에 든 표 10,342개를 전부 같은 짜임으로 읽어 냈다고 공개 검증 결과를 내걸었고, 공개 PDF 벤치마크 200문서에서는 종합 0.96대 점수로 공개 리더보드의 다른 파서들보다 높았다. 스캔본은 OCR이 자동으로 켜지는데, 그것도 인터넷 없이 컴퓨터 안에서 돈다. 폐쇄망 학교와 관공서를 처음부터 염두에 둔 설계다.
비유하자면 kordoc은 통역사라기보다 도면 복원가에 가깝다. 통역은 말을 옮기지만, 도면 복원은 선과 칸의 관계를 살려 낸다. 표의 칸이 살아 있어야 AI는 “3학년 체험학습 예산이 작년보다 얼마 늘었을까?”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읽기만 하는 도구도 아니다. 두 판본을 블록과 칸 단위로 대조해 신구대조표를 만들고, 마크다운으로 고친 내용을 원본 서식 그대로 되돌려 넣으며, 마크다운에서 공문서 프리셋이 적용된 HWPX를 새로 만든다. 우리 기관 문서 몇 건으로 서식 묶음을 만들어 그 서식대로 새 문서를 쓰게 하는 기관팩, 표기법과 공공언어 기준과 예산 산출근거 검산까지 보는 공문서 검수, 개인정보를 찾아 서식을 유지한 채 가리는 마스킹도 들어 있다. 대량 문서는 제목 경로를 붙인 청크로 쪼개 검색 색인에 넣을 수 있다.
학교에서 쓴다면
교사의 손에 쥐어졌을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몇 장면으로 그려 본다. 아래는 도구의 기능에서 끌어낸 가상의 사례다.
| 장면 | 전에는 | kordoc을 붙이면 |
|---|---|---|
| 교육청 지침 개정 | 두 파일을 나란히 띄워 눈으로 비교 | 신구대조표를 만들어 바뀐 조항만 AI에게 설명시킨다 |
| 학교 자체 계획서 | 작년 파일을 복사해 손으로 고침 | 학교 서식을 기관팩으로 묶고 마크다운 초안을 그 서식의 HWPX로 뽑는다 |
| 가정통신문 발송 전 | 동료가 돌려 읽으며 오탈자 점검 | 공공언어·표기법 검수를 돌리고 사람이 최종 확인한다 |
| 규정집 질문 | 파일을 열어 검색창에 낱말을 넣음 | 규정집 전체를 청크로 색인해 근거와 함께 답하게 한다 |
| 스캔된 옛 문서 | 다시 타이핑 | 로컬 OCR로 표까지 복원한다 |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AI가 더 똑똑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AI는 그대로이고, 문서가 읽히기 시작했을 뿐이다. 학생 정보가 든 문서라면 순서가 하나 더 붙는다. 마스킹을 먼저 돌리고 사람이 확인한 뒤에 AI에게 넘긴다. 도구가 개인정보를 찾아 주지만 무엇을 넘길지 정하는 책임은 끝까지 사람에게 있다.
그래도 남는 물음
반론부터 세워 두는 편이 정직하다. 첫째, 한컴 자신이 AI 기능을 제품에 넣고 있는데 굳이 외부 오픈소스가 필요할까? 둘째, 공공기관은 보안 심사와 조달 절차 때문에 개인 개발자의 도구를 쉽게 들이지 못한다. 셋째, 개인 프로젝트는 만든 사람이 손을 놓으면 멈춘다.
셋 다 가볍지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본다. 제품 안의 AI는 그 제품 안에서만 돌지만, 학교 업무는 한글과 PDF와 스캔본과 엑셀이 뒤섞인 채 굴러간다. 형식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구조로 읽어 주는 층이 따로 필요하고, 그 층은 제품에 묶이지 않는 쪽이 오래간다. 도입 절차의 벽은 도구의 결함이기보다 제도의 숙제이고, 코드가 MIT 라이선스로 공개되어 있고 검증 방법까지 적혀 있다는 사실은 그 숙제를 푸는 재료가 된다. 지속성의 불안은 포크로 이어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닫힌 제품보다 오히려 낫다. 개발자 한 사람의 열정에 기대는 구조라는 지적은 맞다. 다만 그 한 사람이 문서지옥을 7년 겪은 당사자라는 점이, 이 도구가 어떤 문제를 겨냥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해 준다.
학교에 AI를 들이자는 말은 많았다. 그 말이 공문 한 장 앞에서 멈추곤 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먼저 열어야 할 것은 모델이 아니라 문서였다. 교무실 컴퓨터의 HWP 파일부터 AI가 읽게 만드는 일, 거기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출처
- chrisryugj, kordoc 저장소 README·벤치마크 문서. https://github.com/chrisryugj/kordoc (2026-11-06 기준 v4.24.47, 별 2,932·포크 518, MIT)
- kordoc 상세 사용법·MCP 도구 목록. https://github.com/chrisryugj/kordoc/blob/main/docs/usage.md
- 이 블로그의 앞선 소개 글, kordoc, HWP·HWPX·PDF 문서를 마크다운으로 바꾸는 오픈소스 도구 (2026-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