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이 수업이 되는 일곱 걸음 — 노벨 엔지니어링과 AI 스토리텔링을 버무리다
한 초등 교사의 수업 준비 기록을 오래 들여다봤다. 조영상 선생님이 패들렛에 쌓아 올린 “Novel Engineering with 바이브 코딩” 보드다. 백설공주, 토끼와 거북이, 샬롯의 거미줄 같은 익숙한 이야기들이 학생 손에서 웹앱이 되어 구글 사이트로 공유되고 있었다. 최근에는 Gems로 빨강머리 앤과 대화하는 챗봇까지 더해졌다. 흩어진 실험처럼 보이지만 카드들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수업 루틴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 글은 그 뼈대를 정리하고, 여현덕 교수의 AI 스토리텔링(AI+ST) 학습법과 필자가 실험해 온 이야기 기반 AI 리터러시 학습법을 겹쳐 하나의 수업 모델로 버무린 기록이다. 글 끝에는 이 루틴을 몇 분 만에 설계해 주는 웹 도구도 소개한다.
패들렛에서 확인한 수업의 뼈대
보드의 카드들은 제각각 다른 책을 다루지만 같은 문법을 반복한다. 인물의 곤란을 발견하고, 공감하고, 해결물을 만들어 공유한다.
| 책 | 인물의 곤란 | 공감의 방향 | 학생이 만든 해결물 |
|---|---|---|---|
| 백설공주 | 계모는 거울의 평가에 매달릴수록 우울해진다 | 계모의 우울한 마음을 헤아려 보자 | 웃음 연습을 도와주는 매직미러 |
| 토끼와 거북이 | 승부 집착과 비열한 경쟁 | 토끼도 거북이도 공정하게 | 함께 골인을 돕는 공정 경주 게임 |
| 샬롯의 거미줄 | 거미줄 글씨를 한국어로만 쓸 수 있을까 | 샬롯의 언어 장벽 상상 | 외국어를 배우는 번역 거미줄 |
| 하나, 둘, 셋, 찰칵! |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와 떠나는 세계여행 | 추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 | 우리가 원하는 네 컷 사진기 |
| 만만한 수학 분수가 뭐야? | 분수 개념이 어렵다 | 분수를 처음 만나는 동생의 눈 | 분수 색칠 학습 코스웨어 |
공유 방식도 정형화되어 있다. 바이브코딩으로 만든 html을 구글 사이트의 코드 삽입 기능에 붙여 게시하고, URL을 나눈다. 학생 산출물이 교실 안 발표로 끝나지 않고 주소를 가진 실물이 된다.
조영상 선생님이 정리한 수업 루틴은 일곱 걸음이다. 노벨 엔지니어링의 고전적 단계(NE Classic)와 생성형 AI가 새로 연 단계(Brand New)가 번갈아 끼워져 있다.
- 책을 읽는다 (NE Classic)
- 등장인물과 가상 대화를 나누며 인물을 이해하고 질문한다 (Brand New)
- 인물의 곤란과 어려움에 공감한다 (NE Classic)
- 해결 아이디어를 설계한다 (NE Classic)
- 생성형 AI와 바이브코딩으로 아이디어를 구현한다 (Brand New)
- 이야기를 바꿔 쓴다 (NE Classic)
- 구현물을 실제로 활용하고 사회에 공유하며 실생활 문제를 해결한다 (Brand New)
눈여겨볼 점은 배치다. AI는 고전적 단계를 하나도 대체하지 않고, 고전적 단계들 사이에서 멈춰 있던 두 지점 — 인물은 침묵했고 구현은 어른의 일이었다는 한계 — 만 정확히 연다. 책 읽기, 공감, 설계, 바꿔쓰기라는 노벨 엔지니어링의 원형은 그대로다.
서사가 개념의 문턱을 낮춘다는 발견, 여현덕의 AI+ST
이 루틴이 우연히 좋은 게 아니라는 근거가 있다. 여현덕 KAIST 교수와 강혜경 교수는 2020년 정보교육학회논문지에 인공지능 스토리텔링(AI+ST) 학습법의 효과를 검증한 사례연구를 실었다.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AI 교육이 수학·통계·컴퓨터공학 전공자만의 것이 되지 않으려면,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도 접근하는 경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설명 가능한 AI(XAI)의 흐름과 MIT Patrick Winston의 “지각 있는 기계를 위한 스토리텔링” 논의에 기대어, 알고리즘 중심 학습법을 스토리텔링으로 보완하는 모델을 설계했다. 대학생 대상 검증에서 확인하려 한 것은 세 가지 — AI 이해력, 흥미도, 응용력이다.
핵심 주장을 교실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수식과 코드는 개념의 정확한 표현이지만 진입로로는 좁다. 이야기는 개념을 인물의 상황과 사건 속에 심어 학습자가 이미 가진 서사 이해 능력으로 개념에 도달하게 한다. 노벨 엔지니어링이 초등 교실에서 해 온 일과 정확히 같은 구조다. 실제로 노벨 엔지니어링으로 초등학생 AI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한 국내 연구도 이미 나와 있다.
이야기 속에서 배우게 하는 또 하나의 실험, 수사일지 시리즈
필자도 같은 가설을 다른 형식으로 실험해 왔다. 학생용 도서로 쓴 명탐정 준의 AI 수사일지와 AI의 지문 — 강이솔의 수사일지는 AI 리터러시 개념을 수사 서사 안에 심은 책이다. 딥페이크 판별, 생성형 AI의 흔적 찾기 같은 개념이 교과서식 정의로 먼저 나오지 않는다. 사건이 먼저 있고, 개념은 사건을 푸는 도구로 등장한다. 독자는 탐정과 함께 단서를 판단하는 동안 개념을 손에 쥔다. 두 권 모두 강의자료 아카이브에서 볼 수 있다.
이 형식을 반복하며 확인한 것이 하나 있다. 학생은 개념을 배우고 나서 이야기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개념이 필요해지는 순간에 가장 깊게 배운다. 수사일지에서 “이 사진이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라는 질문이 절박해졌을 때 딥페이크 판별 원리가 들어오듯, 노벨 엔지니어링에서 계모의 우울에 공감했을 때 매직미러 설계가 시작된다.
세 접근이 겹치는 자리
노벨 엔지니어링, 여현덕의 AI+ST, 수사일지 시리즈는 출발점도 대상도 다르다. 하나는 미국 터프츠대에서 출발한 초등 융합 수업 모델이고, 하나는 대학 비전공자 AI 교육론이며, 하나는 초등 고학년 독서물이다. 그런데 겹쳐 놓으면 네 개의 공통 원리가 드러난다.
| 공통 원리 | 노벨 엔지니어링 | AI+ST 학습법 | 수사일지 시리즈 |
|---|---|---|---|
| 서사가 개념의 진입로다 | 책이 공학 설계의 맥락을 제공 | 이야기로 AI 원리를 설명 | 사건 서사로 AI 리터러시 전달 |
| 공감이 문제 정의에 앞선다 | 인물의 곤란에 공감한 뒤 문제 문장 작성 | 학습자가 이해하는 서사로 개념 재구성 | 피해자·용의자의 상황 이해가 추리의 출발 |
| 학습자가 이야기에 개입한다 | 결말 바꿔쓰기 | 자기 서사로 사례 재구성 | 독자가 탐정과 함께 단서 판단 |
| 추상이 구체로 내려온다 | 설계와 제작으로 손에 잡히는 산출물 | 수식 대신 상황과 사건 | 개념이 사건 해결의 도구 |
세 접근 모두에서 이야기는 장식이 아니라 학습이 일어나는 장소 그 자체다. 그렇다면 생성형 AI가 이 구조에 무엇을 더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인물이 응답하기 시작했고(Gems 가상 대화), 설계가 실물이 되기 시작했으며(바이브코딩), 산출물이 교실 밖 독자를 만나기 시작했다(URL 공유). 서사 학습의 원리는 그대로인데, 서사와 학습자 사이의 상호작용 밀도가 달라진 것이다.
버무린 수업 모델, 일곱 걸음 루틴
이 공통 원리 위에 조영상 선생님의 일곱 걸음을 다시 놓으면, 각 걸음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이론적으로 설명된다. 8차시 기준의 차시 배분 예시와 함께 정리한다.
| 걸음 | 구분 | 차시 | 핵심 활동 | 서사 학습 원리와의 연결 |
|---|---|---|---|---|
| 1. 책 읽기 | NE Classic | 1 | 온책 읽기, 인물 지도 | 서사가 진입로가 된다 |
| 2. 등장인물과 가상 대화 | Brand New | 2 | Gems 캐릭터 챗봇에 질문 | 인물 이해가 깊어지고 질문이 생긴다 |
| 3. 곤란 공감·문제 정의 | NE Classic | 3 | 공감 지도, 문제 문장 쓰기 | 공감이 문제 정의에 앞선다 |
| 4. 해결 아이디어 설계 | NE Classic | 4 | 설계 명세 한 장 | 추상이 구체로 내려온다 |
| 5. 생성형 AI·바이브코딩 구현 | Brand New | 5–6 | 프롬프트로 웹앱 제작 | 설계가 실물이 된다 |
| 6. 이야기 바꿔쓰기 | NE Classic | 7 | 해결책이 든 새 결말 | 학습자가 이야기에 개입한다 |
| 7. 실제 활용·사회 공유 | Brand New | 8 | 구글 사이트·패들렛 게시 | 산출물이 교실 밖 독자를 만난다 |
2번 걸음이 특히 절묘하다. 기존 노벨 엔지니어링에서 공감 단계는 전적으로 학생의 상상에 의존했다. 인물에게 직접 물을 수 없으니, 공감의 깊이는 텍스트를 다시 읽는 성실함에 비례했다. 가상 대화가 끼어들면 학생은 계모에게 “거울이 뭐라고 할 때 제일 속상해?”라고 묻고 답을 받는다. 이 대화 기록이 3번 걸음 공감 지도의 재료가 된다. 상상으로 건너뛰던 다리에 디딤돌이 놓인 셈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두 개의 관문
이 루틴을 실제로 굴리려면 두 개의 실무 관문이 있다. 조영상 선생님의 기록에도 같은 고민이 등장한다.
첫째는 캐릭터 챗봇을 향한 못된 장난이다. AI 컴패니언 서비스의 위험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보여 주었듯, 어떤 가드레일도 작정한 우회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아마추어가 쓴 프롬프트 한 줄로도 상당 부분이 막힌다. 역할 이탈 요청 거부, 개인정보 수집 금지, 유해 표현 차단, 장난이 계속될 때 이야기로 되돌리는 응대 방식을 시스템 프롬프트에 명시하는 것만으로 교실에서 만나는 시도의 대부분이 걸러진다. 여기에 두 가지를 더하면 된다. 교사가 배포 전에 짓궂은 질문을 직접 던져 방어를 시험하는 것, 그리고 학생과 대화 약속을 먼저 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지식 소스 연결이다. NotebookLM에 정리한 책 내용을 Gem의 소스로 곧장 잇는 경로는 아직 매끄럽지 않다.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는 구시대적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줄거리 요약 한 쪽, 인물 관계 목록, 주요 사건 대여섯 개를 텍스트로 정리해 Gem 지식 칸에 직접 붙여넣는 것이다. 번거롭지만 이 방식에는 부수 효과도 있다. 무엇을 붙여넣을지 고르는 일 자체가 교사의 텍스트 재독이고, 저작권 관점에서도 원문 전체 업로드보다 요약·재서술이 안전하다.
설계를 도와주는 작은 도구, NE 수업 디자이너
여기까지의 인사이트를 도구로 옮겼다. NE 수업 디자이너는 책 제목, 등장인물, 인물의 곤란, 학년군과 차시만 입력하면 일곱 걸음 수업 계획을 만들어 주는 한 장짜리 웹 페이지다.
생성되는 것은 세 가지다. 차시가 배분된 7단계 수업 루틴 표(걸음마다 교사 확인 질문 포함), 인물별 Gems 캐릭터 프롬프트, 그리고 수업 전 점검 목록이다. 캐릭터 프롬프트에는 위에서 말한 안전 가드레일 — 역할 이탈 거부, 개인정보 보호, 유해 요청 거절, 위험 신호 시 어른에게 안내 — 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고, 학년군에 맞춰 말투 지침이 바뀐다. 인물 이름의 받침까지 확인해 조사를 맞춘다.
모든 처리는 브라우저 안에서 끝난다. 서버로 가는 데이터가 없으니 학생 정보 걱정 없이 쓰면 되고, 완성된 계획은 마크다운으로 복사하거나 인쇄해 결재 서류의 초안으로 삼으면 된다. 「예시로 채우기」를 누르면 백설공주 예시가 채워지므로 처음 보는 사람도 삼십 초면 감을 잡는다.
책을 읽던 교실과 AI를 만드는 교실은 오래 다른 방에 있었다. 노벨 엔지니어링이 두 방 사이의 문이었다면, 생성형 AI는 그 문을 상시 개방으로 바꾸는 중이다. 다음 학기, 학년 도서 한 권을 골라 동학년 선생님 한 분과 이 일곱 걸음을 같이 걸어 보는 것은 어떨까. 서로의 교실에서 나온 매직미러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출처
- 조영상, Novel Engineering with 바이브 코딩 패들렛 — https://padlet.com/y2round/vibecoding
- 여현덕·강혜경 (2020). 인공지능 스토리텔링(AI+ST) 학습 효과에 관한 사례연구. 정보교육학회논문지, 24(5), 495-509. https://doi.org/10.14352/jkaie.2020.24.5.495
- 노벨엔지니어링을 활용한 초등학생 대상의 인공지능 교육프로그램 (KCI 등재)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96423
- 여현덕 교수 인터뷰, 대전일보 (2025) — https://v.daum.net/v/20251215181812362
- 김진관, 명탐정 준의 AI 수사일지·AI의 지문 — 강이솔의 수사일지 — 강의자료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