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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바이마르, AI 논문 홍수 뒤에 평판이 지대가 된다
조르조 질레스트로(Giorgio Gilestro)는 2026년 9월 20일 자기 블로그 la bottega에 「The Weimar of knowledge」(지식의 바이마르)라는 글을 올렸다. AI가 만든 연구가 학계를 뒤덮으면 지적 활동의 가치가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가치는 개별 연구가 아니라 기관의 평판으로 옮겨 간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 변화를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화폐 붕괴에 빗대고, 그 끝을 중세식 지식 질서로의 회귀로 본다.
지식의 초인플레이션
질레스트로는 학계 곳곳이 곧 AI가 생성한 연구로 넘쳐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arXiv는 1년 전 이 흐름이 시작되는 것을 봤고, 지금은 제출 통제를 강화하고 검수 대기열이 길어진 채 봉쇄 태세에 들어갔다. 머신러닝 학회는 투고가 폭증해 들어오는 논문을 다 심사하지 못한다. 그는 수학·컴퓨터과학·물리학이 먼저 무너지고 의학·생물학·화학이 뒤따를 것으로 본다.
해법을 말하기 전에 그는 문제부터 짚는다. 문제는 지적 소유권이 아니다. 인간이 지성을 독점하던 시대는 분명히 끝났고, 선별 면접 같은 문지기 장치는 순진한 만큼 소용없다고 그는 쓴다. 과학적 정확성도 문제가 아니다. 이런 논문은 아마 대부분 정확할 것이다. 다수가 그저 무의미하거나 중복될 뿐인데, 그는 무의미함조차 환각 문제를 사실상 잊었듯 여섯 달 뒤면 잊힐 문제라고 본다.
그가 꼽는 진짜 문제는 지적 역량에 기댄 모든 활동이 초인플레이션을 맞는다는 점이다. 학계가 먼저 무너지고 나머지 직업 시장이 뒤따른다. 학계는 이미 지난 20~30년 동안 부풀어 왔다. 논문의 질보다 양에 보상하는 잘못된 경력 지표가 원인이었다. 경제학 용어로 하면 왜곡된 인센티브이고, 이것이 지금의 출판 산업을 떠받치며 거품을 키웠다. 그는 AI가 이 흐름을 바이마르 수준까지 밀어붙여 논문의 가치가 0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는 평판으로 옮겨 간다
경제학은 무언가가 인플레이션으로 가치를 잃으면 실제 가치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고 가르친다. 화폐가 휴지가 되면 사람들은 실물을 쥔다. 질레스트로는 같은 이유로 가치가 기관의 평판으로 이동한다고 본다. 쏟아지는 자료가 너무 많아 사람들은 평판 높은 출처에서 나온 것에만 그나마 최소한의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대형 상업 연구소에서 이미 그 모습이 보인다. 앤트로픽과 오픈AI는 더는 연구를 학술지에 싣지 않고(딥마인드는 역사적 이유로 아직 싣는다), 프리프린트와 깃허브 저장소를 공개하는 것으로 끝낸다. 동료 심사를 기다릴 시간도 없고, 그의 말로는 솔직히 그럴 필요도 없다. 제대로 다루고 뒷받침만 하면 LLM은 이미 기술적 타당성을 꽤 잘 검토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이 사례가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을 짚는다. 이 연구소들이 심사를 건너뛸 수 있는 것은 이미 평판 자본을 충분히 쌓아 어떻게 내놓든 읽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절차가 아니라 소수 기관이 마침 쥐고 있는 특권인데, 나머지는 그것을 방법인 양 우러러보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평판은 보상이 아니라 지대다
낙관론은 여기서 무너진다. 질레스트로에 따르면 평판은 노력해서 버는 화폐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평판은 토지처럼 움직인다. 양이 한정돼 있고, 대물림되며, 가진 사람은 새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아도 거기서 수익을 거둔다. 주의가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기관의 브랜드로 흐르는 경제는 지대(rent) 경제다. 지대 경제의 성질은 잘 알려져 있다. 진입이 막혀 있고, 수익이 꼭대기에 몰리고, 생산적인 일은 자산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경제 용어로 틀을 짜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이름 없는 기관의 신진 연구자는 실력으로 읽힐 수 있던 유일한 장치, 곧 연구 자체에 대한 익명 심사를 잃는다. 그 장치가 실제로는 아무리 엉성하게 돌아갔더라도 말이다. 핵심 인맥 밖의 연구실이 신중하고 정확하며 진짜 새로운 연구를 내놓아도 첫 단계에서 걸러진다. 연구가 못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것을 확인할 주의의 여력이 없어서다. 평판은 세습된다. 전에 읽혔기 때문에 또 읽힌다.
그리고 평판은 임대된다. 유명 인사의 승인(imprimatur)만이 논문을 읽히게 만든다면 그 승인에는 값이 붙는다. 원형은 이미 있다. 기여 없이 이름을 올리는 선물 저자(gift authorship), 논문 공장(paper mill), 마지막 저자 경제, 그리고 실질적인 발표 창구가 된 기관 보도자료다. 그는 주의 부족이 지금의 100배 규모로 커지면 이런 일들이 추문이 아니라 시장을 청산하는 장치가 된다고 본다.
오픈 사이언스는 결국 하나의 내기였다. 유료 장벽과 문지기를 걷어 내면 연구가 스스로의 가치로 독자를 찾으리라는 내기다. 질레스트로는 평판 경제가 이 내기를 무효로 만든다고 쓴다. 제약 조건이 접근이 아니라 주의일 때 무료 접근은 아무 가치가 없고, 주의는 브랜드에 따라 배분된다. 그는 이 흐름이 이미 보이고 AI가 그것을 가속할 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읽지 않는 공개 아카이브와 모두가 읽는 폐쇄적 평판 카르텔이 함께 남는다. 지금 떠나는 체제보다 나쁜 결말이고, 이를 누구나 반길 균형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봉건제 2.0
그는 이 상황의 정직한 이름을 지적 중세로의 회귀라고 부른다. 신봉건주의를 다룬 문헌은 이미 쌓여 있다. 세드릭 뒤랑(Cédric Durand)의 『Techno-féodalisme』(2020)이 이 주제를 처음으로 책 한 권 분량으로 다뤘고, 조디 딘(Jodi Dean)의 에세이 「Neofeudalism: The End of Capitalism?」이 같은 해 나와 2025년 책이 됐다.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2023년 『Technofeudalism』으로 이 용어를 대중화했다. 이들의 공통 주장은 이윤이 지대로 밀려나고, 플랫폼 소유자가 자본가들 사이가 아니라 그 위에 올라선 지대 수취 계급이 됐다는 것이다. 예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는 이 틀 전체를 봉건제의 겉멋이라고 공격했다. 질레스트로는 모로조프의 지적, 곧 들어맞지 않는 중세 비유를 띄워 준다는 비판이 옳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모로조프가 AI가 여기에 보탤 몫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누가 예상했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학계가 이 비유를 시험하기에 유난히 깔끔한 사례라고 본다. 근대 이전의 지식 질서가 어땠는지 우리가 알고, 실제로 그 안에 살았기 때문이다. 동료 심사가 자리 잡기 전에는 개인과 기관의 위상이 신뢰를 좌우했고, 그건 그리 먼 옛날 일도 아니다. 『네이처』는 1973년에야 외부 심사를 의무화했다. 영국 기득권층의 학술지라는 비판을 떨치고 싶어 한 편집장 아래에서였다. 왓슨과 크릭의 DNA 논문은 외부 심사를 거치지 않았다. 캐번디시 연구소장의 보증이면 충분했다. 그는 이것이 앞서 설명한 바로 그 메커니즘이 1953년에 작동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논문은 어느 연구실에서 나왔느냐가 아니라 절차로 평가받는다는 20세기의 합의는, 앞뒤로 같은 체제에 둘러싸인 아마 60년 남짓의 예외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다르게 본다. 평판 경제를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직접 들여다보고 판단하던 짧고 역사적으로 특이한 실험을 끝내고 원래 체제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중세 구조는 학술지보다 훨씬 먼저 대학에 있었다. 총장(chancellor)이 내주던 교수 허가(licentia docendi), 스스로 회원을 받아들이던 교수 길드가 그 예다. 권위는 기관이 쥐고 개인에게 나눠 주는 일종의 프랜차이즈였다. 지금도 출판 승인을 뜻하는 말로 쓰는 임프리마투르(imprimatur)는 원래 검열관의 용어다.
질레스트로는 이 패턴이 사회 전체로 일반화될지는 정말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자신의 조급함도 의심하겠다고 덧붙인다. 다만 이 패턴이 어디선가 맞아떨어진다면 학계가 가장 먼저일 것이고, 학계는 탄광의 카나리아로 손색없다고 본다. 불편한 대목은 중세 방식이 작동했다는 점이다. 엉성하고 배타적이었고 극소수만을 위해 돌아갔지만, 수백 년 동안 지식을 만들어 냈다. 체제는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부당할 수 있다. 그가 봉건제를 끌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텍스트는 싸고 데이터는 비싸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지금 가치가 무너진 것은 텍스트다. 논증, 유도, 문헌 검토, 논의 섹션이 그렇다. 수학과 이론 컴퓨터과학이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산출물 전체가 기호 조작이고, 기호 조작이 바로 이 시스템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이 늦게 영향을 받는 것은 생물학자가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정하는 단계가 물리적이어서다. 초파리 1,000마리가 자는 모습을 6주 동안 기록한 영상은 생성할 수 없고 직접 실험해야 한다. 동물과 배양기와 카메라가 필요하고, 실험 공간 설계가 틀렸다는 걸 알려 준 실패한 예비 실험도 거쳐야 한다. 이 비용은 0으로 내려가지 않으며, 추론 능력을 아무리 늘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새 체제의 진짜 자산이 측정 장비와 그 장비가 만든 데이터셋이고, 결정적으로 그 장비가 믿을 만한 결과를 내게 하는 암묵지라고 본다. 장비를 가진 쪽이 아직 희소한 유일한 투입물을 쥔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다음 문장의 근거다. 기술봉건주의 시대에 오픈소스 하드웨어 개발은 무장 저항이다.
그는 다음 수순도 예측한다. 데이터가 더는 공개 저장소에 올라가지 않거나, 늦게 올라가거나, 기술적으로는 공개지만 실제로는 쓸 수 없는 형태로 올라간다. 데이터를 모은 그룹이 이제 그것만이 자기 소유물이라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품질 관리라는 설명이 붙겠지만, 그의 표현으로는 예전과 같은 모양의 지대가 다른 자산에 붙어 돌아오는 것이다.
맞대응은 복잡하지 않고 그저 유행에 뒤떨어졌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측정값만이 아니라 장비 자체를 계속 공개하라는 것이다. 오픈 하드웨어, 오픈 수집 소프트웨어, 오픈 원본 데이터를 내놓고, 다른 사람이 장비를 직접 만들어 보고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방법을 자세히 적는다. 누구나 복제할 수 있는 설계는 임대될 수 없다. 그는 이것이 오픈소스를 지지하는 논리의 전부이고, 5년 전보다 지금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인 교훈과 다음 단계
질레스트로는 글 끝에 네 가지 교훈을 남긴다.
- 값싼 저항은 소용없다. 이 미래를 싸움 없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문지기를 세우려는 시도는 힘 낭비이고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제정신이라면 AI가 혼자 만들었다는 이유로 질병 치료법을 거부할 사람은 없다. 지금 면접이나 추천으로 문을 지키는 방안을 고민하는 건 생산되는 자료가 아직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인데, 곧 그렇지 않게 된다.
- 인센티브를 다시 짜야 한다. 이제는 타협할 수 없는 필수 과제다. 한 사람의 지적 기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하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
- 장벽을 낮추고 창의성에 보상해야 한다. 인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들어서고 있다. 기계와의 지적 싸움은 트로이 목마, 곧 값싼 재치의 작은 불꽃으로 이긴다. 그런 것에 보상해야 한다.
- 민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움직인다. 결국 최전선의 속도를 따라가게 되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사회의 모든 영역이 민첩해져야 한다.
항상성의 눈으로 다시 보면
생명체는 바깥 환경이 바뀌어도 몸 안의 상태를 일정하게 지키려 한다. 질레스트로가 그리는 회귀도 이와 닮았다. AI가 지식 생산을 폭증시키는 외부 충격이 오자, 학계는 기존의 위계와 평판 체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균형을 되찾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깊어져도 체제는 새 균형점에서 스스로를 유지한다. 그가 말한 안정적이면서 부당한 체제가 바로 이런 불편한 항상성이다.
출처
- Giorgio Gilestro, 「The Weimar of knowledge」, la bottega(2026-09-20). https://giorgio.gilest.ro/the-weimar-of-knowled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