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 612
AI가 대신 써주는 시대, 우리는 왜 여전히 글쓰기를 가르치는가?
25명의 작문 연구자가 한자리에 모인 이유
2025년 2월,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교(UC Irvine)에 미국 전역의 작문 연구자 25명이 모였다. 연방정부 기금으로 운영되는 WRITE 센터가 주최한 이틀짜리 서밋이었고, 목표는 하나였다. 중·고등학생의 글쓰기 교육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증거 기반 합의를 만드는 일. 그 회의의 결과물이 이 논문이다. 서밋은 중등 작문 지도를 위한 9개 권고와 향후 연구를 위한 7개 권고를 내놓았고, 이 글에서는 교실과 정책에 곧바로 맞닿는 앞의 9개를 정리한다.
왜 하필 지금인가. 논문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선명하다. 생성형 AI가 학생을 대신해 문장을 뽑아내는 시대가 되면서, 글쓰기가 오랫동안 학생에게 주던 것이 증발할 위험에 놓였다. 그 잃어버릴 것이란 스스로 생각을 짜맞추고 문제를 풀며 배우는 인지적 과정이다. 읽기 교육에는 국가적 관심과 예산이 쏟아졌지만 글쓰기는 늘 그 그늘에 있었다. 이 논문이 첫머리에서 겨누는 지점은 여기다. 도구가 글을 대신 써주는 순간에, 우리는 글쓰기가 애초에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정책에서 교실까지, 9개 권고의 지형
9개 권고는 국가 정책이라는 가장 높은 층위에서 출발해 교실 안 구체적 실천으로 좁혀 내려온다. 한눈에 보기 위해 세 층위로 묶으면 다음과 같다.
| 층위 | 권고 | 한 줄 요지 |
|---|---|---|
| 정책·우선순위 | 1. 글쓰기를 국가적 우선순위로 | 읽기만큼의 관심과 자원을 글쓰기에도 |
| 2. 모든 학년에서 지도 시간 확대 | 숙달에는 절대적 연습량과 시간이 필요 | |
| 학교·구조 | 3. 범교과 학습 도구로서의 글쓰기 | 국어만이 아니라 모든 교과에서 쓰기 |
| 4. 협력이 가능하도록 학교 구조 개혁 | 공동 효능감과 채점 부담 경감 | |
| 9. 모든 교사를 글쓰기 지도자로 준비 | 글쓰기는 전 교과의 공동 책임 | |
| 교실·실천 | 5. 형성평가적 마음가짐 | 평가를 지도로 되먹임 |
| 6. 학생의 삶에 반응하는 환경 | 정체성·선택권·배경 지식의 존중 | |
| 7. 증거 기반 교수법 | 효과가 입증된 방법을 일상으로 | |
| 8. AI를 포함한 기술의 전략적 활용 | 파트너로 쓰되 과의존을 경계 |
이 배열 자체가 하나의 주장이다. 교실 실천을 아무리 다듬어도 시간과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것. 그래서 논문은 교사에게 더 잘하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정책과 학교 시간표부터 손보라고 말한다. 특히 권고 3은 글쓰기를 국어 시간에 가두지 말라고 못 박는다. 역사가가 사료를 다루는 방식과 과학자가 증거를 쓰는 방식이 다르듯, 교과마다 지식을 구성하고 검증하는 글쓰기의 문법이 다르다. 이것이 교과 문해력(disciplinary literacy)이고, 학생이 여러 교과에서 저마다의 목적으로 쓸 때 개념은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한 가지 미리 짚어둘 대목이 있다. 이 권고들은 교과 교사제가 뿌리내려 있고 예산·시간표 재량이 학교 단위로 큰 미국 중등학교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한국 교실로 옮길 때 그대로 포개지지 않는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다룬다.
증거가 가리키는 교수법
논문에서 가장 실용적인 대목은 권고 7이다. 감이나 관행이 아니라 실험으로 효과가 확인된 교수법을 교실의 기본값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열거된 방법은 이미 오래 검증된 것들이다.
| 검증된 실천 | 교실에서 무엇을 하는가 |
|---|---|
| 과정 중심 글쓰기 | 기획·초안·평가·수정을 분리된 단계로 반복한다 |
| 글쓰기 목표 설정 | 이 글에서 무엇을 해낼지 구체적 목표를 먼저 세운다 |
| 사전 탐구·자료 구성 | 쓰기 전에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조직한다 |
| 우수한 글 모방 | 잘 쓴 글의 구조를 뜯어보고 그대로 따라 써본다 |
| 동료 상호 지원 | 서로의 초안을 읽고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
| 전략의 명시적 지도 | 문법·문장 구성·요약 같은 기능을 직접 가르친다 |
| 시각적 비계 | 다언어 학습자에게 그래픽 조직자와 시범을 제공한다 |
주목할 것은 이 방법들이 하나같이 글쓰기를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반복되는 과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굴러가게 하는 연료가 피드백이다. 권고 5가 말하는 형성평가적 마음가짐이 바로 그 지점을 겨눈다. 평가는 등수를 매기려고 있는 게 아니라 다음 지도를 조정하려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마음가짐을 학생에게도 옮겨야 한다는 대목이다. 스스로 자기 글을 점검하고 타인의 피드백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여 고쳐 쓰는 학생만이 교사 없이도 성장한다.
여기서 현실의 벽이 등장한다. 더 자주 쓰게 하면 교사의 채점 부담이 폭발한다. 논문이 권고 4에서 내미는 답은 콜린스 방식(Collins Writing Program)이다. 한 과제에서 모든 오류를 다 잡으려 하지 말고, 이번에는 이 두세 가지만 본다고 초점 교정 영역을 미리 정해 그 부분만 채점하는 방식이다. 채점이 가벼워지니 학생은 더 자주 쓰고, 피드백은 더 선명해진다. 채점 과부하로 수행평가 횟수 자체를 줄이곤 하는 한국 교사에게 이 발상은 곧바로 쓸모가 있다.
권고 6은 무엇을 가르치느냐에서 어떤 자리에서 쓰게 하느냐로 시선을 옮긴다. 학생이 안심하고 쓰고 나눌 수 있는 환경일 때 글쓰기 효능감과 정체성이 자란다는 것이다. 논문은 학생이 이미 가진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결핍이 아니라 자원으로 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지식 기금(funds of knowledge)이라는 개념이고, 학생에게 주제·독자·장르의 선택권을 돌려줄 때 글은 과제가 아니라 자기 발화가 된다. 어떤 학생은 글 속에서 자기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찾고, 어떤 학생은 다른 세계를 내다보는 창을 찾는다. 반응적 환경이란 그 둘을 모두 허용하는 교실이다.
AI라는 뜨거운 감자
권고 8은 이 서밋이 열린 이유이자 가장 조심스러운 대목이다. 논문의 입장은 균형론이다. 워드프로세서부터 ChatGPT까지, 기술은 학생의 계획·초안·수정을 돕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AI는 학생의 아이디어 구상과 수정 방향을 거들고, 교사의 맞춤 지도안 개발과 평가를 지원한다. 다만 AI에 지나치게 기대면 글쓰기 고유의 학습 효과가 약해지므로, 교사는 학생이 AI를 윤리적이고 전략적으로 조율해 쓰도록 이끌어야 한다.
방향은 옳다. 그런데 이 권고를 교실에서 실제로 굴려보려 하면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 균형이라는 말은 경계선을 그어주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생각을 돕는 도구이고 어디부터가 생각을 대신하는 대필인가. 논문은 그 선을 긋는 판단을 사실상 교사 개인에게 통째로 넘긴다. 원칙은 합의됐지만 그 원칙을 매 수업, 매 과제에서 집행하는 부담은 여전히 개별 교사의 몫으로 남는다.
둘째, 권고 2와 권고 8은 은근히 서로를 잡아당긴다. 학교 현장은 AI를 시간을 아껴주는 도구로 반긴다. 그런데 이 논문의 논리대로라면 아낀 시간은 다시 글쓰기로 되돌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AI는 글쓰기 시간을 늘리는 쪽이 아니라 없애는 쪽으로 작동한다. AI는 글쓰기를 돕는 도구가 될 수도, 글쓰기를 대체해 학습 자체를 지우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둘을 가르는 것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교사가 그어둔 경계다.
한국 교실로 가져올 때
이 문서는 처방전이 아니라 합의된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미국 중등이라는 토양에서 자랐다. 권고 1·2·4처럼 국가 예산과 학교 시간표를 손대야 하는 층위는 개별 교사가 당장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국어과 중심에 입시 압력이 얹힌 한국 구조에는 곧바로 포개지지도 않는다. 이 유보를 지우고 읽으면 좋은 권고도 공허한 당위가 된다.
그럼에도 교실 층위의 권고 5·6·7·8은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권고 9의 메시지, 곧 글쓰기가 국어 교사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교과 교사의 공동 책임이라는 명제는 교과 칸막이가 높은 한국일수록 더 아프게 유효하다.
거창한 개혁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같은 학년 교사 둘이 이번 학기 수행평가에서 채점할 초점 영역을 딱 두 개로 맞춰보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서로의 채점 기준 한 줄을 학년 메신저에 공유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25명의 학자가 이틀에 걸쳐 합의한 방향의 끝에는 결국 교사 두 사람이 채점표 한 장을 나란히 놓고 무엇을 볼지 정하는 작은 장면이 놓여 있다. 방향은 위에서 오지만, 글쓰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출처
Graham, S., Olson, C. B., Baker, T., & Chung, H. (2025). The future of writing instruction and research at the secondary level: Recommendations from the WRITE Center summit. Reading and Writing. https://doi.org/10.1007/s11145-025-1072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