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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활용 선도교사 연수가 열리는 날이면 SNS와 단톡방이 뜨거워진다. 한쪽에서는 이 연수가 공교육을 병들게 한다고 말한다. 다른 쪽에서는 사흘 내내 들어보니 수업 설계와 성찰이 중심이었고 기술은 그다음이었다고 말한다. 같은 연수를 두고 정반대의 증언이 나란히 올라온다. 눈여겨볼 것은 이 어긋남이 단순히 시선의 차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쪽에는 사흘을 직접 앉아 겪은 증언이 있고, 다른 쪽에는 듣지 않은 연수를 그럴 것이라 넘겨짚은 추측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 겪은 것과 짐작한 것이 같은 무게로 부딪치니 그림이 어긋난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왜 같은 것을 이렇게 다르게 보고, 왜 서로를 오해하는가.

이 물음을 붙드는 이유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해가 생기는 자리를 함께 들여다보아, 편을 가르기보다 서로를 잇고 논의를 넓히고 싶어서다. 덧붙이면, 나 또한 내가 걸어온 길에서 세상을 본다. 이 글도 그 한계를 안고 쓰는 하나의 시선일 뿐 정답이 아니다. 뒤에서 짚는 이야기도 남보다 먼저 나를 향한 말이다.

문제제기의 요지

연수를 둘러싼 문제제기는 크게 세 갈래로 모인다.

첫째, 아동·청소년의 AI 사용 문제다. 사춘기가 끝나기 전에 아이가 AI와 관계를 맺는 것이 위험하다는 조너선 하이트의 경고를 인용하며, 교사나 에듀테크 업체가 손본 챗봇을 학생에게 쥐여 주고 피드백을 받게 하는 실천을 걱정한다. 하이터치·하이테크의 취지는 기술로 아낀 시간을 사람과의 관계에 되돌려주자는 것이었는데, 방향이 거꾸로 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둘째, 연수 자체를 당장 멈추고 전면 재검토하라는 주장이다. 교사의 AI 역량이 높아지면 학생의 배움과 학교 문화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성찰이 보이지 않고, 강사는 이제 AI가 있으니 교사가 지도안을 짜거나 교육과정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수강자는 이 과정을 또 다른 곳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는 통로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셋째, 열두 개의 질문이다. 우선순위, 등가성, 지속성, 기회비용, 절제와 판단, 근거, 수혜자, 대체, 자율성, 프레임, 시급성, 필요성. 교사의 교육과정 문해력보다 AI 리터러시가 더 중요한가, AI를 능숙하게 다루는 교사가 곧 잘 가르치는 교사인가, 이 역량 강화가 학생 학습을 실제로 높인다는 증거가 있는가 같은 물음이다.

정당한 질문은 접어둘 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제기의 밑바닥에는 아이들과 교육을 향한 진짜 걱정이 깔려 있다. 그 마음까지 의심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걱정에 값하는 응답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문제제기 안에는 어떤 교육 정책이든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이 들어 있다. 근거가 있는가, 무엇을 포기하고 얻는가, 언제 쓰지 않을지 판단하는 힘을 가르치는가, 진짜 수혜자가 누구인가. 이 네 가지는 AI 연수가 아니라 어떤 연수 앞에서도 유효하다. 사춘기 이전 아동이 AI에 상시 노출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도 가볍지 않다.

그러니 이 질문들은 반박의 대상이 아니라 연수가 계속 껴안아야 할 짐이다. 잘 쓰면 연수를 닫는 빗장이 아니라 논의를 넓히는 문이 된다. 문제는 질문의 알맹이가 아니라, 그 알맹이를 담은 그릇, 곧 “그러므로 연수를 멈춰라”로 건너뛰는 논리의 비약에 있다.

그런데 어디서 어긋나는가

첫 번째 어긋남은 범주의 혼동이다. AI 교육에는 성격이 다른 두 흐름이 있다.

구분 AI 이해교육 AI 활용교육
묻는 것 AI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AI로 교육 목적을 어떻게 이루는가
중심 역량 개념·원리·윤리 이해 도구를 수업 설계에 녹이는 힘
대표 장면 인공신경망 원리 강의 수업용 도구·자료 제작 실습

이번 연수의 이름은 인공지능 활용 선도교사 연수다. 말 그대로 활용 역량 과정이다. 교육과정 문해력과 교수학습의 심화를 정면으로 다루는 과정은 이미 별도로 있고 함께 굴러간다. 활용 과정을 붙들고 교육과정 문해력이 없다고 전면 부정하는 것은, 국어 수업을 참관하고 왜 수학을 안 가르치느냐고 나무라는 것과 닮았다. 하이트의 경고도 같은 자리에서 미끄러진다. 그의 우려는 학생이 AI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지, 교사가 활용 역량을 기르는 연수에 관한 것이 아니다. 교사 대상 연수를 학생의 AI 노출과 곧장 등치시키면 논점이 어긋난다. 물론 교사가 학생에게 챗봇을 그대로 넘기는 실천은 따로 따져볼 문제이고, 그 우려는 정당하다. 다만 그것은 연수를 멈출 근거가 아니라 연수가 다뤄야 할 주제다.

두 번째 어긋남은 일화의 과잉 일반화다. 같은 연수를 두고 제미나이·노트북LM 사용법 설명 수준이었다는 증언과, 사흘 내내 수업 설계를 마이크로티칭하고 성찰했다는 증언이 동시에 존재한다. 위탁 구조상 권역마다 수행 기관이 다르고, 강사의 편차가 크며, 초등과 중등의 사정도 다르다. 도구 시연에 그친 강의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 비판은 정당하다. 문제는 그 한 장면을 연수 전체의 초상으로 키우는 순간에 생긴다. 같은 바이브 코딩이라도, 만드는 화면을 자랑하듯 시연하는 것과, 수업에 딱 맞는 도구가 없어 직접 만들어 설계 안에 심어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다. 라벨만 보면 둘은 구별되지 않는다. 최악의 사례로 전체를 재단하면 균형 잡힌 다수는 지워진다.

세 번째 어긋남은 사실 전제의 착오다. 연수를 이수했거나 강사로 참여한 이들의 말을 모으면, 문제제기가 깔고 있는 전제와 그림이 꽤 다르다.

제기된 전제 연수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
유례없는 규모의 연수 3년차이고 규모는 이전보다 축소
도구 사용법만 다룬다 핵심 과제는 수업 설계·마이크로티칭·성찰·개선
개선 없이 반복된다 현직 교사 모니터링, 예산 축소 등 개선의 흔적
수업·평가 과정이 없다 관련 과정은 별도로 존재하며 병행

전제가 흔들리면 결론의 무게도 함께 흔들린다. 여기에 더해, 이 논의에는 개선의 노력마저 반론을 미리 무마하려는 수순으로 읽어 내는 시선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반증도, 균형 잡혔다는 증언도 개선의 흔적도 프레임을 흔들지 못한다. 반증이 아예 불가능한 주장은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검증의 자리에서 스스로 걸어 나간 것이다.

왜 이렇게 단정하게 되는가

여기서부터가 핵심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강점이라는 렌즈로 남을 본다. AI 디지털 교육에 들어온 경로는 저마다 다르다. AI 자체가 궁금해서 온 사람, 에듀테크 활용에 끌려서 온 사람, 수업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온 사람. 그래서 강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강점의 렌즈로 상대를 재단하기 시작할 때 생긴다.

오해 내용
오해 1 AI 기술·이해를 주로 연수하는 교사는 수업 설계가 부족할 것이다
오해 2 AI 도구 활용을 주로 연수하는 교사는 이해도 설계도 부족할 것이다
오해 3 수업·평가 설계를 연수하는 교사는 AI 이해나 도구 활용이 부족할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를 잘하면 다른 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과연 그런가.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어려운 것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가르치는 사람은 흔하다. 하나를 잘하고, 둘도 셋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그러니 상대도 이럴 것이라 넘겨짚고 만다.

여기에 겪지 않은 것을 짐작으로 메우는 습관이 겹친다. 사흘을 앉아 들은 사람보다, 전해 들은 인상만으로 연수의 속을 단정하기가 오히려 쉽다. 겪음의 자리를 추측이 대신하면 확신은 되레 커진다.

원인을 좀 더 좁혀 보면 세 겹이다. 첫째, 자기 선호에 따른 선택적 취사다. 자기 취향에 맞는 사례만 골라 담으면 하나는 맞고 둘은 틀리고 셋은 맞는 아리송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 아리송함 자체가 렌즈가 좁다는 신호다. 둘째, 남들은 잘 모른다는 기본 전제다. 이 전제를 깔고 시작하면 나만 본질을 안다는 높은 자리에서 상대를 내려다보게 된다. 셋째, 좁은 근거 위에 세운 확신이다. AI 디지털 교육이 품은 여러 범주, 곧 이해와 활용과 설계와 평가와 윤리와 정책을 폭넓게 살피지 못한 상태에서 신념이 서면, 역설적으로 말이 더 단정적으로 나온다. 넓게 아는 사람일수록 조심스럽게 말하고, 좁게 아는 사람일수록 확신에 차서 말한다.

오해하지는 말자. 이건 특정한 누군가의 결함이 아니다. AI와 도구 쪽에 선 사람도, 수업과 설계 쪽에 선 사람도 똑같이 빠지는 함정이다. 나부터도 내 강점 쪽으로 남을 쉽게 재단했고,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아는 듯 말한 적이 많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유혹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이 진단은 누군가를 향한 손가락질이 아니라, 나부터 들여다보는 거울에 가깝다.

가르기가 아니라, 넓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오해는 상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끝까지 따라가면 내가 그 범주들을 여러 렌즈로 넓게 보지 못한 탓으로 돌아온다. AI와 도구 쪽에 서서 수업 설계의 가치를 못 느낀다면 AI 디지털 교육에서 교육의 자리를 되새겨야 한다. 반대로 수업 설계 쪽에 서서 AI와 디지털에 시종 부정적이라면 AI 디지털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어느 쪽도 혼자서는 온전하지 않다. 두 자리는 겨루어 하나가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엮여야 비로소 한 그림이 되는 조각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편을 가르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경로로 들어온 강점을 하나로 엮고, 이 논의를 더 넓히는 일이다. 정당한 질문들, 곧 근거와 기회비용과 절제와 수혜자에 대한 물음은 연수를 없앨 이유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끌고 갈 좌표다. 지금의 활용 연수는 성찰로 이어지기 위한 기초다. 여기서 멈추자는 게 아니라, 생성한 수업과 평가 자료를 함께 놓고 성찰하고 논의하는 다음 과정으로 잇자는 뜻이다.

한 가지가 더 마음에 걸린다. 시간이 지나 이런 주장과 논지 위에서 정작 논의와 숙의는 사라지고, 목소리 큰 몇몇 스피커의 존재감만 덩그러니 남는 일이다. 이 글의 주장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때 남는 것이 생각의 두께가 아니라 사람의 크기라면, 우리는 논의를 넓힌 게 아니라 그저 시끄러워진 것이다.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단순화하면 이해는 쉬워지지만 왜곡된다. 상대를 내 강점으로만 재단하면 판단은 간명해지지만 오해는 그만큼 커지고 대화는 편으로 갈린다. 반대로 내 렌즈의 좁음을 인정하는 순간 자리는 넓어진다. 이 글도 그 좁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판정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마음으로 둔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만나 보면 알게 된다. 하나만 잘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때, 논의는 갈라지지 않고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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