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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육 연수에 가면 어느 순간 칠판에 같은 단어들이 적힌다. 창의성, 공감, 비판적 사고, 협업.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역량이라는 제목 아래. 몇 해째 반복되는 이 목록을 보며 드는 의문이 있다. 저 목록은 왜 해마다 조금씩 짧아지는가.

송미나 광주 하남중앙초 수석교사가 더에듀에 쓴 칼럼은 이 습관을 정면으로 짚는다. 인간다움을 AI가 못 하는 것에서 찾는 순간 인간다움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쪼그라든다는 지적이다. 처음엔 계산과 분석이 인간의 몫이라 했다. AI가 계산하자 창의성과 언어로 물러섰고, AI가 글과 그림을 만들자 이제 공감과 윤리와 책임만 남았다고 한다. 이 진단은 정확하다. 그리고 그가 절반쯤만 말하고 넘어간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빈칸에 세운 인간다움

이 목록이 줄어드는 방식에는 이름이 있다. 과학철학에는 ‘틈새의 신(God of the gaps)’이라는 오래된 오류가 있다.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한 빈틈에만 신을 불러들이는 태도다. 문제는 과학이 한 칸씩 설명해 나갈 때마다 신의 자리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인간다움에 하는 일이 꼭 이렇다. AI가 아직 못 하는 빈칸에만 인간다움을 세워 두면, 모델이 한 번 업데이트될 때마다 인간의 영토도 한 칸씩 깎인다. 이웃집 울타리가 아직 넘어오지 않은 자리를 내 땅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울타리가 조금 밀려올 때마다 내 땅이라 믿던 곳을 내주게 된다.

더 깊은 혼동은 그다음이다. AI가 사람처럼 말하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이니, 우리는 결과가 비슷하면 속도 같으리라 여긴다. 송 수석교사의 표현을 빌리면 결과의 유사성을 존재의 동일성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AI는 입력된 자료로 결과를 뽑고, 인간은 살아온 경험에서 의미를 읽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며 그 선택을 감당한다. 답안이 닮았다고 사고의 방식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그가 이 대목에서 든 인권 비유는 특히 좋다. 인권은 남보다 뛰어나서, 혹은 약해서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기억을 잘해서도, 공감을 잘해서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정된다. 인권의 기준이 다른 존재와의 비교가 아니라 인간 자체이듯, 인간다움의 기준도 AI가 아니라 인간이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그의 칼럼이 도달한 지점이고, 옳다.

곧 만료되는 이유

그런데 이 진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불편한 결론이 따라온다. 우리가 미래역량이라 부르며 교육과정 문서마다 반복해 온 그 목록, 창의성과 협업과 비판적 사고 자체가 바로 이 빈칸의 인간다움을 정책 언어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좋은 취지의 단어들이지만, 그 정당화의 밑바탕이 “AI가 아직 못 하니까”라면 목록은 AI의 다음 버전 앞에서 언제든 흔들린다.

교실로 내려오면 문제는 더 구체적이다.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AI는 진짜 글을 못 쓰니까 너는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이유는 다음 모델이 나오는 날 만료된다. 반대로 “글을 쓰면서 네 생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이유는 어떤 업데이트에도 살아남는다. 같은 수업, 다른 이유다. 그리고 아이가 평생 지니는 것은 수업이 아니라 그 이유다.

결승선이 뒤로 물러나는 경주

가장 강한 반론은 철학이 아니라 밥벌이에서 온다. 교사도 학부모도 “그래서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 남느냐”를 묻는다. 인간다움을 AI의 빈칸에서 찾는 습관은 한가한 착오가 아니라, 일자리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실제 불안의 그림자다. 존재론 강의로 달랠 수 있는 두려움이 아니다. 이 반론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불안이 진짜라는 사실이 아이들을 기계와의 달리기에 세우는 일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결승선이 계속 뒤로 물러나는 경주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따라잡히도록 설계된 트랙에 아이를 세우는 것보다, 애초에 그 경주장 밖에서 살아갈 힘을 길러 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대비다. 기계보다 잘하는 한 가지를 남기려 애쓰는 교육은, 그 한 가지가 무너지는 날 함께 무너진다.

송 수석교사는 인간다움의 기준을 인간에게 돌려놓아야 한다고 맺는다. 동의한다. 다만 그 문장이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돌려놓는 일은 칠판의 목록을 고쳐 쓰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아이에게 왜 이걸 배우느냐고 물었을 때 대는 대답을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AI가 못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너를 어떤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때문이라고. 인간다움을 AI의 빈칸에서 찾는 한 우리는 업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아이에게 줄 이유를 하나씩 잃는다. 기준을 인간에게 되돌린다는 말의 진짜 뜻은 그 이유를 잃지 않는 것이다.

출처

  • 송미나. (2026, 8월 2일). [AI시대, 미래교육의 함정] ④’인간다움’을 잘못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에듀. https://www.te.co.kr/news/article.html?no=2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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