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이 없는 학교는 표류한다 — 비전에서 미션으로
학교 개혁은 거의 언제나 시험과 시간표에서 시작한다. 무엇을 더 효율적으로 돌릴지부터 묻는다. 맥타이와 커티스는 그 순서가 틀렸다고 말한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우리 졸업생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며, 그 답에서 거꾸로 학교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준화 시험이 아니라 졸업생 상에서 시작하라
《학교, 이렇게 바꾼다》의 첫 두 장이 던지는 주장은 단순하지만 뒤집기 어렵다. 학교를 움직이는 힘이 표준화 시험 점수, 진도, 행정 일정 같은 일상의 즉각적 압력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압력은 늘 급하고 늘 눈앞에 있어서 학교의 모든 결정을 빨아들인다. 그래서 정작 학교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회의 안건 맨 뒤로 밀린다.
저자들이 내미는 대안은 미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지금 1학년 교실에 앉은 아이가 10년 뒤 살아갈 세상을 먼저 그리고, 그 세상에서 잘 살아갈 사람의 모습을 정의한 다음, 그 모습을 향해 학교를 거꾸로 짜맞춘다. 위긴스와 함께 만든 백워드 설계(UbD)를 한 단위 수업이 아니라 학교 시스템 전체에 적용한 것이다. 단원 설계에서 원하는 결과를 먼저 정하듯, 학교 개혁에서도 졸업생이라는 최종 결과를 먼저 정한다.
여기서 비전과 미션이 갈린다. 둘은 흔히 한데 뭉뚱그려지지만 저자들은 둘을 분명히 나눈다. 그리고 순서를 강조한다. 비전이 먼저 서고, 미션이 그로부터 나온다.
| 구분 | 비전(Vision) | 미션(Mission) | 졸업생 상(Profile of a Graduate) |
|---|---|---|---|
| 묻는 것 | 왜, 무엇을 향해 | 무엇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 졸업 시점에 무엇을 알고·할 수 있고·어떤 태도인가 |
| 시간축 | 먼 미래의 그림 | 현재의 실천적 약속 | 졸업이라는 구체적 지점 |
| 추상도 | 가장 높음 | 중간 | 가장 구체적 |
| 산출물 | 영감을 주는 방향 | 행동으로 옮긴 목적 | 교육과정·평가의 표적 |
비전은 도달하고 싶은 미래의 그림이라 영감을 준다. 미션은 그 그림을 향한 학교의 실천적 약속이라 방향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졸업생 상은 그 약속을 교육과정과 평가가 겨눌 수 있는 과녁으로 바꾼다. 추상적인 비전이 측정 가능한 설계로 내려오는 사다리인 셈이다.
비전에서 졸업생 상으로 내려오는 사다리
저자들이 제시하는 청사진의 골격은 비전에서 미션으로, 미션에서 졸업생 상으로 이어진다. 졸업생 상은 21세기 역량을 교과 표준과 묶어내는 자리다.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창의성, 협업이라는 이른바 4C가 단독으로 떠다니지 않고 교과 내용 안에서 길러지도록 연결하는 것이다. 단순 암기에 머무르지 않고 배운 것을 새로운 상황에 자율적으로 적용하는 능력, 곧 장기 전이목표가 이 설계의 중심에 놓인다.
| 도구·틀 | 하는 일 |
|---|---|
| UbD 백워드 설계의 시스템 확장 | 한 단원이 아니라 학교 전체를 졸업생 상이라는 최종 결과에서 거꾸로 설계 |
| 비전 → 미션 → 졸업생 상 단계 | 추상적 열망을 단계적으로 측정 가능한 표적으로 구체화 |
| 졸업생 상(Profile of a Graduate) | 21세기 역량을 교과 표준과 통합한 졸업 시점의 초상 |
| 장기 전이목표 | 학습을 낯선 상황에 스스로 적용하는 장기 성취를 정의 |
| 4대 시스템 정렬 | 교육과정·평가·수업·보고를 졸업생 상에 맞춰 한 방향으로 정렬 |
표가 말하는 핵심은 정렬이다. 졸업생 상 하나를 정해두고 교육과정도, 평가도, 수업도, 성적 보고도 모두 그 상을 겨누게 만든다. 학교에서 흔히 보는 풍경, 즉 학교상은 멋진데 평가는 객관식이고 수업은 진도이고 통지표는 석차인 따로국밥 상태를 끊겠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이 책의 새로움은 백워드 설계 자체가 아니다. 백워드 설계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새로운 것은 그 논리의 적용 단위를 한 명의 교사가 짜는 한 단원에서 학교 전체가 합의하는 시스템으로 끌어올린 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난이도는 설계 기법이 아니라 합의에 있다.
우리 교실로 옮겨 보면
여기서부터는 블로거인 내가 한국 학교 맥락에 비춰 풀어보는 해석이다. 저자들이 한국 사례를 든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겹치는 것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의 6대 핵심역량이다. 자기관리, 지식정보처리, 창의적 사고, 심미적 감성, 협력적 소통, 공동체. 이 여섯은 저자들이 말하는 졸업생 상과 사실상 같은 장르다. 차이가 있다면 6대 역량은 국가가 내려준 공통 목록이고, 졸업생 상은 단위 학교가 자기 학생과 지역을 보고 직접 다시 쓰는 초상이라는 점이다.
| 적용 장면 | 저자들의 틀이 닿는 지점 |
|---|---|
| 2022 개정 6대 핵심역량 | 졸업생 상을 우리 학교 언어로 다시 쓰는 출발 목록 |
| 고교학점제 | 학교 비전을 학생 진로·과목 선택의 나침반으로 삼는 근거 |
| IB Learner Profile | 10개 속성 자체가 졸업생 상과 같은 장르 — 정렬 도구로 직결 |
| 학교 자율시간·교육과정 편성권 | 단위 학교가 자체 졸업생 상을 세울 실제 여백 |
| 과정중심평가 | 원하는 결과를 먼저 정하는 논리를 학교 단위로 확장 |
예를 들어 어느 중학교가 6대 역량 중 협력적 소통과 창의적 사고를 자기 학교의 졸업생 상 1순위로 골랐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 질문은 가차없어진다. 그 두 역량을 우리 평가는 실제로 재고 있는가. 우리 시간표는 모둠이 진짜로 갈등하고 조율할 시간을 주는가. 통지표는 그 성장을 보여주는가. 졸업생 상은 이렇게 일상의 모든 칸에 같은 질문을 들이댄다는 점에서 단순한 슬로건과 다르다.
본질적으로, 한국 학교에서 이 책이 가장 아플 지점은 교훈이다. 우리 교훈 대부분은 비전도 미션도 아니다. 성실, 창의, 봉사 같은 네 글자는 미래의 그림도 아니고 실천적 약속도 아닌, 측정 불가능한 덕목의 나열에 가깝다. 저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비전 자리에 걸린 장식이지 학교를 움직이는 나침반이 아니다.
정렬이 쉬운 게 아니라 합의가 어렵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 책의 약점이자 정직함은 같은 곳에 있다. 청사진의 단계는 깔끔하다. 비전, 미션, 졸업생 상, 4대 시스템 정렬. 하지만 깔끔한 단계도가 그려진다고 학교가 그렇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졸업생 상을 교사 두세 명이 워크숍에서 만들어 벽에 붙이는 일은 하루면 된다. 어려운 것은 그 상을 전체 교직원이 진짜로 자기 것이라 여기게 만드는 일이다.
IB Learner Profile을 그대로 복사해 오는 학교와 자기 학생을 보며 한 줄씩 직접 쓴 학교는 출발선은 같아 보여도 결과가 다르다. 남의 졸업생 상은 액자가 되고, 우리가 싸워가며 합의한 졸업생 상은 평가지를 바꾼다. 합의의 고통을 건너뛰면 정렬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이 첫 두 장을 비전과 미션에만 통째로 쓴 이유가 여기 있다고 본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가장 자주 생략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당장 해볼 작은 시도 하나를 남긴다. 우리 학교 교훈을 종이에 적고 옆에 한 가지만 표시해 본다. 이것은 도달하고 싶은 미래의 그림(비전)인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길러낼지에 대한 약속(미션)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가. 셋째 칸에 표시가 된다면, 그 종이가 이 책 1·2장을 읽어야 할 첫 번째 이유다.
출처
원서: McTighe, J., & Curtis, G. Leading Modern Learning: A Blueprint for Vision-Driven Schools. Solution Tree Press.
한국어판: 제이 맥타이·그레그 커티스 지음, 강현석·조인숙 옮김, 《학교, 이렇게 바꾼다》,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