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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안쪽 벽에는 거의 모든 학교가 자기만의 비전을 걸어 둔다. “창의융합형 인재”,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같은 문장이다. 그런데 그 문장이 3학년 2반 수요일 3교시 수업과 다음 주 수행평가지와 학기 말 통지표를 실제로 바꾸고 있는가. 제이 맥타이와 그레그 커티스의 《학교, 이렇게 바꾼다》는 바로 이 간극, 현관 액자와 교실 사이의 거리를 정면으로 겨눈다.

학교, 이렇게 바꾼다 — 비전에서 통지까지 한눈에 읽는 미래학습 설계

저자들이 던지는 한 문장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21세기에 어울리는 학습은 새로운 수업 기법 몇 가지를 도입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교가 바라는 졸업생의 모습에서 거꾸로 설계할 때, 비로소 교육과정·평가·수업·통지가 같은 방향으로 정렬된다.

맥타이는 그랜트 위긴스와 함께 만든 백워드 설계(Understanding by Design, UbD)로 잘 알려져 있다. 단원을 짤 때 먼저 도달할 결과를 정하고, 그 결과를 확인할 평가 증거를 결정한 뒤, 마지막에 학습 경험을 설계하는 3단계 방식이다. 이 책의 야심은 그 원리를 한 단원이 아니라 학교 시스템 전체로 끌어올린 데 있다. 목적지를 먼저 정하고 경로를 짜는 여행처럼, 학교라는 거대한 조직 자체를 결과에서부터 거꾸로 설계하자는 제안이다.

여기서 맥타이 사상의 토대가 되는 개념 몇 가지를 배경으로 정리해 둔다. 다만 아래 개념들은 UbD 계열 문헌에서 확립된 것이며, 이 책 본문에 어떤 형태로 얼마나 명시적으로 재수록됐는지는 원서 대조가 필요한 지점이다.

개념 쉬운 풀이 이 책에서의 위치
백워드 설계 원하는 결과 → 평가 증거 → 학습 경험 순으로 거꾸로 짜기 학교 시스템 수준으로 확장한 책 전체의 뼈대
졸업생 프로필 “졸업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관찰 가능한 역량 목록으로 번역 추상적 비전을 합의 가능한 공통 언어로 내리는 단계
전이(Transfer) 배운 것을 시험지가 아니라 처음 보는 실제 상황에 스스로 적용하는 힘 현대 학습이 지향하는 궁극의 성취
본질적 질문 정답 하나로 닫히지 않고 탐구를 계속 여는 질문 교육과정을 관통하는 사고의 축

전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수영 동작을 칠판에 적어 외우게 하는 교육과, 처음 보는 물에 던져 놓아도 헤엄칠 수 있게 만드는 교육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저자들은 후자를 측정하지 못하는 평가는 비전과 어긋난다고 본다.

네 영역을 한 방향으로 정렬한다는 것

이 책을 관통하는 실천 틀은 비전이 네 개의 실무 영역을 일관되게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 평가, 수업, 그리고 통지다. 통지(reporting)는 성취를 어떻게 기록하고 소통하는가에 관한 영역으로, 우리로 치면 통지표와 생활기록부가 여기 닿는다. 네 영역의 정확한 공식 명칭과 개수는 한국어판·원서 목차로 재확인할 필요가 있으나, 정렬이라는 설계 원리 자체는 책의 일관된 축이다.

전통적 학교와 현대 학습이 각 영역에서 어디가 갈라지는지를 대조하면 이렇게 정리된다.

영역 전통적 학교 비전 주도 현대 학습
교육과정 진도표와 교과서 차례를 따라감 졸업생 프로필에서 거꾸로 역산해 편성
평가 회상·재생 중심 선다형 낯선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수행과제
수업 교사의 전달, 학생의 수용 본질적 질문으로 여는 학생 주도 탐구
통지 학습이 끝난 뒤의 사후 점수 기록 역량 성취를 드러내고 학습을 촉진하는 신호

이 표를 한 줄로 줄이면, 비전은 추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무해하지만 네 영역 중 하나라도 옛 방식에 남아 있으면 전체가 옛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가장 자주 끌어내리는 닻이 통지다. 수업과 평가를 아무리 바꿔도 학기 말 산출물이 숫자 점수 한 줄이면, 학생과 학부모는 그 숫자만 보고 학습의 목적을 재구성한다.

비전에서 교실까지 내려오는 정렬의 사다리는 다음처럼 그려진다. 단계의 정확한 도식 명칭은 원서 확인이 필요하나, 위에서 아래로 구체화되는 흐름 자체는 책의 논리다.

단계 산출물 주된 책임 주체
비전 학교가 지향하는 한두 문장 학교 공동체 전체
미션 비전을 행동 언어로 푼 진술 학교 리더십
졸업생 프로필 관찰 가능한 역량 5~7개 교사 합의체
전이 목표 역량별 장기 수행 목표 교과·학년 단위
측정 가능한 학습목표 단원·차시 수준의 도달 기준 개별 교사

우리 교실로 옮겨 보면

여기서부터는 블로거인 내가 한국 교실 맥락으로 번역한 해석이며, 책에 실린 사례가 아니라 가상의 예임을 분명히 해 둔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깊이 있는 학습과 여섯 핵심역량을 전면에 세웠다. 자기관리, 지식정보처리, 창의적 사고, 심미적 감성, 협력적 소통, 공동체 역량이다. 이 책의 졸업생 프로필 작업은 이 역량 목록을 우리 학교만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과 정확히 포개진다. 추상적 역량명을 “우리 학교 학생은 졸업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는 문장으로 내려쓰는 작업이다.

2022 개정 6대 핵심역량 졸업생 프로필 진술로 옮긴 예시(필자의 가상안)
지식정보처리 낯선 자료에서 신뢰할 정보를 가려 근거로 쓴다
창의적 사고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에 자기 해법을 설계한다
협력적 소통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결과물을 함께 만들어 낸다
공동체 자기 결정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 본다

전이를 평가로 옮기는 자리에서는 맥타이·위긴스가 제안한 수행과제 설계 도구 GRASPS가 떠오른다. 목표(Goal), 역할(Role), 청중(Audience), 상황(Situation), 결과물(Product), 기준(Standards) 여섯 요소로 실제 맥락을 모방한 과제를 짠다. 이 도구가 이 책에 직접 실렸는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과정 중심 평가와 수행평가가 확대되는 우리 흐름에 그대로 쓸 수 있는 양식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 1학년 과학 수업이라면, “교실 미세먼지가 높은 날 환기 안내문을 만들어 게시판에 붙인다”는 과제는 측정·자료 해석·소통 역량을 한 번에 끌어낸다. 선다형 다섯 문항으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 능력이다.

고교학점제와 학교 자율시간도 같은 렌즈로 본다. 과목을 왜 개설하는가를 졸업생 프로필에서 거꾸로 묻는 순간, 과목 선택 구조 전체가 시스템 사고의 대상이 된다.

비판적으로 짚는 한 지점

본질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 한국 현장에서는 가장 큰 약점으로 뒤집힌다. 정렬이라는 개념은 네 영역을 학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선다. 그런데 우리에게 통지의 끝단인 생활기록부와 수능은 학교 바깥에서 규격이 정해진다. 졸업생 프로필을 아무리 정교하게 합의해도, 대학이 읽는 신호가 표준화된 점수와 정형화된 기록일 때 정렬의 사다리는 마지막 칸에서 끊긴다.

정확히는, 이 책을 그대로 이식하면 비전과 통지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래서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의 쓸모는 완전한 청사진이 아니라 진단 도구에 가깝다. 네 영역 중 어디에서 비전과 실천이 어긋나는지를 비추는 거울로 쓸 때 가장 정직하게 작동한다. 손댈 수 없는 칸을 인정하고, 손댈 수 있는 칸부터 정렬하는 현실 감각이 함께 가야 한다.

후속 글 안내

이 글은 책 전체를 꿰는 허브다. 일곱 개 장과 부록의 아크를 네 영역과 정렬 사다리를 따라 다섯 편으로 나눠 깊이 파고든다.

후속 글 다루는 영역
비전에서 미션으로 액자 속 문구를 행동 언어로 내리는 첫 단계
미션에서 실행으로, 교육과정 설계 졸업생 프로필에서 역산하는 교육과정 편성
평가 시스템 다시 짜기 전이를 측정하는 수행과제와 실제적 평가
현대 학습을 위한 수업 본질적 질문과 학생 주도 탐구의 수업 설계
통지 시스템, 학습의 마지막 신호 통지표와 생기부를 학습 촉진 장치로

닫으며

오늘 당장 해 볼 작은 시도 하나를 남긴다. 우리 학교 비전 문장을 종이 한 장에 적고, 그 아래에 “그래서 우리 학생은 졸업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다섯 줄로 적어 본다. 그 다섯 줄이 이번 학기 내 수행평가지 한 장과 닿아 있는지 짚어 본다. 닿지 않는다면, 비전은 아직 현관 벽에 머물러 있다.

출처

원서: McTighe, J., & Curtis, G. Leading Modern Learning: A Blueprint for Vision-Driven Schools. Solution Tree Press. (초판 2015, 2판 2019) 한국어판: 제이 맥타이·그레그 커티스 지음, 강현석·조인숙 옮김, 《학교, 이렇게 바꾼다》,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0. (저본이 된 원서 판본은 원서·역서 판권면에서 최종 확인 필요)